안기부 불법도청 사건 때문에 자주 웃는다. YS와 삼성과 중앙일보와 한나라당의 위선과 부도덕이 폭로된 게 고소해서가 아니다. 언론과 시민단체와 법률가들이 정색하고 떠드는 말들이 하도 말 같지 않아서다. 어제 아침에는 더 크게 웃었다. 도청내용 공개에 앞장선 신문이 ‘누군가 당신을 엿듣고 있다’는 시리즈를 싣고, 국가기관의 도ㆍ감청이 국민의 프라이버시를 위협한다고 짐짓 걱정하는 척 한다. 그런데 신문 사설은 그렇게 엿들은 범죄혐의를 샅샅이 수사, 법질서를 수호하라고 외친다. 우습지 않은가.
이번 사태에서 놀란 것은 남달리 인권과 자유를 떠들던 언론과 시민단체 와 법률가들이 천박한 법의식 또는 법감정(a sense of justice)을 서슴없이 내보인 것이다. 법의 상식을 짓밟는 궤변을 일삼는 이들과 곧장 시비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기에, 멀리 미국 사법사의 교훈부터 살핀다.
1920년대 미국에서 수사기관의 도청이 문제됐을 때, 연방대법관 대다수는 헌법이 금지한 불법수색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영장 없는 도청은 헌법위반이라며 이렇게 일깨웠다. “정부는 좋게 든 나쁘게 든 국민의 본보기가 된다. 정부의 범법행위는 법을 경멸하게 하고, 국민이 제각기 법을 만드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다.”
브랜다이스는 일찍부터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을 제한 없이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불신하며 개인의 프라이버시 권리를 주창, 뒷날 기념비적 인권 판결에 이름을 남겼다. 연방대법원은 1960년대에 이르러 영장 없는 도청은 불법 수색이고, 그렇게 얻은 범죄증거는 재판에 쓸 수 없다는 판례를 확립했다. 1961년 판결은 “불법수집 증거를 배척하지 않는 것은 헌법을 위반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선언했다. 헌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국가권력의 침해에서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브랜다이스의 경고를 인용,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법을 어기는 것, 특히 국가의 기초인 헌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보다 더 빠르게 국가를 붕괴시키는 것은 없다”고 거듭 일깨웠다.
우리 헌법질서에서도 도청을 비롯한 불법적 수색 압수 체포 고문 등 정당한 법 절차를 어기고 얻은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 달리 말하는 법률가는 사소한 예외를 빌미로 여론을 속이는 것이다. 범죄수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권력의 정보 공작정치에 이바지한 도청 기록을 사법 정의 실현의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다.
여론이 지나간 정부의 불법도청보다 정치자금 비리를 비난하는 것은 이해한다. 내가 도청 당한 것도 아닌 바에야, 기득권 세력의 검은 거래를 까발리고 응징할 것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언론과 법률가들이 국민의 알 권리와 사회 정의 등을 끌어대는 것은 미운 놈 벌주기 위해 법치의 근본을 허물자는 것과 다름없다. 법 원칙까지 어기며 돌봐야 할 국민의 알 권리는 없고, 헌법이념과 어긋나는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이 명백한 사리는 도청 테이프가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한층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그 것도 공개해야 형평에 맞다고 말하는 것은 외환 위기처럼 은밀하게 닥친 재앙의 세례를 골고루 맞자는 소리와 같다. 공익이 더 크면 위법성이 없어진다거나, 검찰이 법을 어길 수는 없으니 국정원이 공개하게 하자는 따위 주장에 솔깃해 하는 것은 어리석다.
권력이 엿들은 내용이 못내 궁금하고, 어떤 큰 범죄단서가 숨어 있더라도 묻을 수 밖에 없다. 그게 국가권력의 잠재적 위협에서 국민 각자의 프라이버시와 인권를 지키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길이다. 그러려면 무작정 검찰 불신을 떠들게 아니라, 법원에 테이프 처리를 맡기는 방안 등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빗나간 논란에 매달리는 이들은 ‘빅 브라더’니, 도청 공포니, 프라이버시니 하는 말을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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