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도청테이프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고, 지지율이 떨어진 대통령이 내각제를 추진하고 있는 나라는?
힌트: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최근 최고재판소의 위헌판결이 정권에 타격을 입혔고, 대통령의 딸이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
뻔한 질문에 웬 힌트가 그리 많냐는 대답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답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필리핀이다.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이 퇴진 위기에 몰린 나라다. 상황설정은 다르지만, 공교롭게 요즘 필리핀 신문의 정치면에는 우리 정치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단어들이 똑같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아로요 대통령의 전화통화를 녹음한 테이프들이 시중에 나돌면서 스캔들이 일었다. 대통령의 딸인 그의 세수증대정책은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과 필리핀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민중의 힘으로 쟁취한 권력구조가 조락(凋落)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필리핀의 정치가 마치 우리 민주화의 선행지수처럼 상서롭게 받아들여질 때가 있었다. 5공화국 말기, 우리 신문들은 염원을 담아 필리핀의 황색돌풍을 지면에서 키웠다. 1986년 2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고, 이듬해 필리핀은 6년 대통령 단임제 헌법을 채택했다. 우리 직선제 개헌보다 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 혁명의 과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로요 대통령은 “내각제만이 무정부상태를 막을 수 있다”면서 “개헌을 하지 않으면 필리핀의 정치는 퇴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30일에는 “피플 파워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대통령의 축출, 여론재판, 탄핵이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각제 추진은 필리핀의 많은 정치세력을 묶어주는 고리가 되고 있다. 호세 데 베네시아 하원의장 같은 인물은 “일본 인도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서 성공한 나라는 모두 내각제”라면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곤경을 겪고 있는 나라만이 미국식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군부의 지원을 받는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이 개헌일정을 매개로 아로요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내년 총선에서 내각제로 이행할 경우 초대 총리로 거명되고 있다.
정정불안의 원인을 권력구조 탓으로 돌리는 아로요 대통령의 주장은 엉뚱하다. 그의 탄핵사유는 도청테이프에 나타난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부정개입 의혹, 그리고 남편과 하원의원인 아들ㆍ시동생이 불법도박조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부패 의혹이다. 그래서 필리핀 집권세력의 개헌 움직임은 세력확대와 퇴임 후 보장을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럼에도 개헌움직임이 탄력을 받는 것은 피플파워의 향배를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비교적 성공적인 임기를 수행했지만, 극심한 레임덕을 겪은 끝에 98년 대선에서 ‘필리핀의 로빈 훗’이라고 불린 배우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그가 축출된 뒤 ‘존 웨인’이 별명인 액션배우 페르디난드 포 2세가 민중의 대표로 등장했고, 지금은 그의 미망인이자 역시 배우 출신인 수잔 로체스가 야당의 상징인물로 부상하고 있다. 탄핵시 권력승계자인 노리 데 카스트로 부통령도 인기 TV 캐스터 출신이다. ‘호헌세력’으로 꼽히는 인물들의 프로필에는 ‘지명도는 높으나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 는 똑 같은 구절이 따라다닌다.
효율적 국가경영과 정국 안정의 관건은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국민의 수준일 경우가 많다. 희망을 주던 민주화의 신화는, 대중적 인기와 정치적 선택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우화(寓話)가 되어가고 있다.
유승우 국제부장sw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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