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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9) 대치동에서 신림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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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9) 대치동에서 신림동으로

입력
2005.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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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학원으로 유명해진 대치동. 반드시 이 때문만은 아니다. 대치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자본계층의 이기심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몇 단계의 복층 구도를 갖는다. 우선 대치동의 학원은 다른 학원들보다 몇 배 높은 명중률을 자랑한다. 그만큼 비싸다. ‘큰돈을 내면 일류대학 들어가기가 쉬워진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순히 학원 인기 때문에 집값이 올라가는 정도가 아니다. 입시라는 온 국민의 공동 약점을 미끼로 조직적인 시세 조작이 자행되기도 한다. 경제 권력으로 교육 권력을 사고 다시 그것으로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리려는 가족 이기주의의 총본산이 되어버렸다. 유교왕정 시대 때 법제화된 차별구도에 의해 권력이 세습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것이 자본이라는 신종 매개를 끼고 일어난 차이점만이 있을 뿐이다. 유교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유교 자본주의의 메카, 대치동. 겉으로 보면 강남의 다른 아파트 단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냥갑 같은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있고 그 사이에 상가건물이 있다. 조금 살펴보면 상가건물에 들어있는 업소의 종류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학원가이니 학원이 많은 건 당연할 수 있다. 생각보다는 학원 수가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고교 교과과정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종류별로 다 몰려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많은 것도 특이하다. 다른 아파트촌에 비해 월등 많다. 아파트 값 상승의 주범이라는 오명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른 특이한 가게들도 많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건강 관련 업종들이다. 한의원과 생식전문점이 유난히 많으며 요가학원, 통증의학 병원 등도 있다. 이주공사도 있다. 이곳에서 학원을 다니다가 아니다 싶으면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가거나 이민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웰빙 열풍 가운데에서 아직도 애들 간식거리용 가게가 주로 미국 패스트푸드점인 점은 유교 자본주의의 속성을 말해주는 현상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곳은 청소년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이 주인인 공간은 방송국 공개홀 빼고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고 휴게공간으로 만화방이 있다.

이상을 종합해서 대치동 사람들의 일상을 짜볼 수 있다. 아이들은 학원에서 이런저런 과목의 과외를 받는 일이 주요 일과이며 체력보강을 위해 한의원에서 보약이나 생식전문점에서 생식을 사 먹인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통증이 생기면 통증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저녁은 주로 맥도날드나 KFC로 때우며 간식은 배스킨 라빈스에서 해결한다. 자전거로 집과 학원을 오가며 머리를 식히기 위해 만화방을 찾는다. 어른들은 부동산 중개업소를 들락거리며 집값을 점검하고 여차하면 미주로 이주할 작전을 짠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아파트값이 가장 비싸다는 동네의 일과이다.

유교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건축적 조형성으로는 사각형이 강한 지배구도를 이루는 점을 들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대치역 주변 안내도부터 보자. 아파트를 그린 수 십 개의 성냥갑만으로 한 동네가 이루어진다. 그 사이에 학원건물이 몇 개 박혀있다. 지하철에서 밖으로 나오면 사각형 현실은 더욱 확실해진다. 아파트가 대형 사각형이라면 학원건물들은 작은 사각형을 이룬다. 각 층은 가지런한 사각형으로 잘게 나뉘고 각종 학원과 주변시설들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15층 아파트에서 상가 업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사각형들의 정렬은 물론 부동산 가치를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조형형식이다. 다른 여유는 필요 없다.

이전부터 눌러 살아온 사람들은 학원 덕에 아파트값 오르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학원에 다닐 목적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어차피 1, 2년 잘 버텨서 일류대학 들어가면 미련 없이 뜰 뜨내기 손님일 뿐이다. 그 사이에 아파트값이나 더 올라있으면 횡재한 것이요, 안 그래도 일류대학만 들어가면 상관없다. 이런 상태에서 동네에 사각형 이상의 안정적 조형 환경이 만들어질 리 없다.

대치동 학원가는 신림동 고시촌으로 이어진다. 대치동에서 살아남아 일류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고시에 매달린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교 자본주의의 진정한 완성은 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든지 고위공무원이 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 뒤에는 가족 자본주의라는 유교 자본주의의 쌍둥이가 버티고 있다.

따져보자. 요즘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애들은 부유층 자녀가 다수이다. 돈은 이미 부모가 충분히 벌어놓았다. 자식까지 돈 벌려고 버둥거릴 필요 없다. 돈은 부모한테서 물려받으면 되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 돈을 권력화하는 일이다. 고시에 합격해서 권력을 꿰차는 것이 그 지름길이다. 고시 합격은 개인의 성공일 뿐 아니라 가족, 즉 가문을 위한 성역(聖役)이 된다. 가난한 고시생은 옛말이다. 고시촌에서 몇 년씩 버티기 위해서는 집안의 경제력은 필수이다.

집에 돈 없어서 과외 못 받으면 일류대학 못 가듯이 고시도 똑같다. 결국 돈으로 대학 가는 계층이 돈으로 고시까지 사는 것이다. 과외 열풍과 부동산 광풍의 유교 자본주의에 고시 망풍(妄風)의 가족 자본주의까지 갖추면 비로소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 ‘과외-부동산-고시’의 권력지향형 트로이카를 하나로 묶어주는 최고 형님은 돈이다. 이런 메커니즘은 자본주의 가운데 가장 저질의 것이지만 이것을 못해서 자살까지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신림동 고시촌의 건축적 조형성은 대치동을 참 많이도 닮았다. 대치동을 거쳐 온 사람이 신림동으로 몰려들고 존재의 이유가 같으니 건축현상도 같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대치동의 사각형 구도가 그대로 반복된다. 대치동과 달리 큰 사각형은 사라지고 최소 단위의 작은 사각형만이 다닥다닥 붙어서 조형 환경을 지배한다. 우선 길부터 좁다. 원래 주택가 골목이었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반대로 보자면 굳이 이런 좁은 골목길에 몰려든 것은 고시준비생 특유의 불안 심리에서 나오는 폐쇄적 집단화일 수 있다.

최소 사각형은 고시원 원룸에서 절정에 달한다. 닭장처럼 늘어선 각 방은 감옥소 독방 크기 정도이다. 고시촌 전역이 과밀인데다 이곳 거주자들도 하루라도 빨리 시험에 붙어서 뜨고 싶은 뜨내기 손님들이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환경 이외의 여유는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공간의 모든 것은 부동산 가치로만 환산된다. 업종도 특이하다. 대치동에 있던 만화방이 이곳에서도 중요한 휴게 기능을 맡고 있다. 공간의 주인이 20대로 넘어갔기 때문에 성인 PC방이 유난히 많아진 점이 차이점이다. 스포츠 마사지 같은 성매매 업소도 고시원과 등을 맞대고 있다.

대치동 학원가와 신림동 고시촌.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우수한 재목들이 10대와 20대를 보내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 속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시험 점수와 합격-불합격만으로 환산된다. 공간의 가치는 부동산 논리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물리적 골격은 사각형의 엄격한 면적 제일주의만으로 떠받들어진다. 이런 것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는 이들은 어쩌면 가장 불쌍한 희생양일 수 있다.

부모들이, 사회가 만들어 이들을 등 떠밀어 집어넣은 것에 가깝다. 이때의 부모란 가족 자본주의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욕망의 화신이요, 사회란 유교 자본주의의 망령에 짓눌린 시대의 사생아일 뿐이다. 대치동과 신림동에서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십 년 뒤에는 사회의 권력층으로 등극하며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지 참으로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다. 아니, 벌써 그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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