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3년전까지 나는 홍석현씨를 언론인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일보보다 발행부수가 훨씬 많은 신문사의 주인으로, 그가 언론을 통해 갖고 있는 영향력이 나보다 크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언론의 역할이란 모름지기 억울한 약자의 소리를 대변하고 강하고 사악한 권력집단이 숨기려는 것을 폭로하는데 있다고 믿어왔기에 부모 잘 만나 언론사의 주인이 되어 때로는 사돈기업과 자기기업의 이익을 위해 신문을 활용하는 그를 언론인의 범주에 넣어주고 싶지 않았다. 객관적인 지위나 역할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의 지도는 그랬다.
-사죄 핑계로 협박성 글 실은 중앙
그러다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는 크게 다른 중앙일보의 논조를 보면서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몇몇 인터뷰에서, 남북문제에 관해 언론이 앞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를 언론인으로 다시 끼워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가 주미 대사로 가는 것을 보면서 ‘역시 어쩔 수 없구나’라고 생각은 했다.
유엔 사무총장이니 대권도전이니 하는 말들이 돌 때면 언론을 배경으로 삼고야 마는 그의 태생적 한계를 분명히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 전방위에서 미국 내 지인이 있는 이라면 미국 대사직은 참 잘 수행하겠다는 생각은 했다.
1997년 국가안전기획부가 도청한 테이프를 통해 삼성의 정치자금을 대신 건네준 일이 드러나면서 그가 주미대사직을 그만두게 된 사건은 어쩌면 과거로부터 크게 성숙해진 한 인간이 과거의 사건에 발목이 잡혔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그가 사임하면서 “이번 일로 많은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런 분들께 용서를 구할 뿐”이라고 뒤늦게나마 밝힌 것은 다행스럽다.
그런데도 중앙일보는 생뚱맞은 주장을 계속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26일자에서는 독자들에게 사죄의 말을 올린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과거의 일을 왜 다시 끄집어내냐는 투로 문제를 덮으려고 하더니 27일자에는 당시 도청팀 팀장 인터뷰라는 명목으로 다른 언론사도 다 문제가 있다는, 협박성 글을 올리는가 하면 28일자에는 불법도청의 문제점에만 초점을 맞춰서 테이프를 유출한 이들이 삼성에게서 돈을 후리려고 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도청은 불법이고 도청을 통해 얻은 정보를 공개하는 것도 불법이며 그걸 공개한 이들에게는 탐욕스런 속내가 깔려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언론사 발행인이 대기업의 불법 정치자금 분배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며, 그 대기업은 또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고위 관료들과 검사에게까지 뇌물을 주었다는 내용이나, 그 같은 방식으로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 했느냐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법리만을 따져도 사회정의를 위해서 이뤄진 언론보도는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것은 언론 관련 판례들이 입증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이걸 모른다는 말인가.
세계적인 대기업 삼성이 보인 억울하다는 태도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이다. 돈과 스캔들 정보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만으로 덮여질 사안이 아니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속속들이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법을 방패 삼아 진실을 가리려 한다면 국민들은 삼성이 과거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잘못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법 방패 산아 진실 덮으려는 삼성
이 점은 검찰 역시 마찬가지이다. 솔직히 지금 삼성이 이회창씨나 김대중씨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는 덜 궁금하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다.
진짜 밝혀져야 할 것은 삼성이 어떤 검사에게 얼마의 뇌물을 주었느냐는 점이고, 기아자동차 인수를 위해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었는가이다. 이들은 지금도 권력을 행사하고(또는 왜곡하고) 있는 현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도청의 불법성만을 문제삼고 있다면 사안의 중대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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