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기부 X파일’을 통해 삼성이 기아차 인수와 관련, 정ㆍ관계에 금품 로비를 한 정황이 드러나며 ‘삼성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안기부 X파일’의 내용은 기아차 부도가 삼성의 자금 압박 및 전방위 로비 때문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당시 기아차 부도사태가 온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 넣은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에서 이 부분이 정확히 규명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삼성의 기아차 인수 음모론은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의 주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1999년 국회 청문회에서 “97년 4월부터 3개월간 삼성캐피탈을 필두로 한 제2금융권이 5,500억원의 대출금을 갑작스레 회수하는 바람에 기아차가 부도에 몰린 것”이라며 “이는 삼성이 뒤에서 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회장측은 또 삼성차 공장 부산 유치 등을 주도한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가 기아차를 화의 대신 법정관리로 처리할 것을 고집했다며 삼성의 로비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
이러한 삼성 음모론은 여러 정황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물증이 없어 하나의 설로만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안기부 X파일’의 공개로 이 같은 음모론이 사실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안기부 X파일’에 따르면 1997년4월7일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은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강 부총리에게도 인사를 좀 하면 좋겠다”는 취지의 얘기를 꺼내자 이 비서실장이 “3,000만~5,000만원 정도를 주자”고 하면서 강 부총리는 사실 자신이 결정적으로 밀어 줬다고 말한다. 삼성과 강 전 부총리가 끈끈한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1997년9월 초의 녹취록에서도 홍 사장은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 후보와 만난 이야기를 이 비서실장에게 전하며 “김 후보가 ‘삼성자동차와 국가경제, 기아 회생에 좋은 안이 있다면 당당히 밝히는 게 좋다. 그러면 나도 도와줄 수가 있다’고 말했다”며 “솔직히 우리도 안 할 말로 조금 마음을 둬야지 만약 될 지도 모르잖아요”라고 언급한다.
이에 이 비서실장은 “알 수 없죠, 보험료라고 생각하면”이라고 답한다. 삼성이 97년 당시 대선후보 등 정ㆍ관계에 걸친 전방위 금품 로비를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은 93년 삼성이 기아차 주식을 사 모은 점, 97년8월 ‘그룹 자동차사업의 조기 경쟁력 확보를 위해 쌍용 및 기아차의 전략적 인수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삼성 내부 보고서가 유출된 점, 98년 기아차에 대한 국제 공개입찰에서 삼성이 제안서를 낸 점 등과 맞물리며 삼성 음모론을 구체화시켜주고 있다.
실제로 97년 당시 기아차는 제2금융권의 대출금 회수로 부도 위기에 몰리자 고강도 자구계획을 밝히고 화의를 신청했으나 법정관리를 거쳐 98년 국제 공개입찰에서 현대차에 매각되는 과정을 밟는다. 싼 금리만 보고 차입금의 50% 이상을 단자사로부터 빌려 쓰던 기아차는 5,500억원의 대출금 회수가 한꺼번에 몰리자 자금 경색에 빠졌다.
경영진은 계열사를 28개에서 14개로 축소하고 노조는 정상화할 때까지 무분규를 결의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물론 분식결산 규모가 4조5,000억원에 달한 점도 기아차 부도의 원인으로 빼 놓을 수 없다.
삼성의 기아차 인수 로비 부분은 대가성이 분명한 뇌물의 성격을 띠고 있어 특정범죄가중처법법(공소시효 10년)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에서도 핵심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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