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식민지 청년의 비애는 우승 직후 녹음한 기념 연설에도 남아있다.
“(생략)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중략) 나는 무의식 중에 죽을 힘을 다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겼습니다. (중략)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할 것이외다. (생략)”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이 육성 녹음은 유성기 음반 ‘우승의 감격’(일본 콜럼비아 레코드)에 들어있다. 이 음반은 8월2~27일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열리는 해방 60주년 기념 음반자료 특별전 ‘한민족의 발자취를 소리에 담다’에 나온다.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국내 한 음반사가 앞의 친일 발언 부분을 삭제한 채 CD로 복각한 적이 있으나 전체 공개는 처음이다.
국립국악원과 한국고음반연구회가 마련한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100년을 국악ㆍ가요ㆍ동요 등 음악 뿐 아니라 각종 연설과 낭독 등 한국인이 녹음한 다양한 소리들로 돌아보는 자리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전쟁과 분단에 이르는 고통의 역사, 해방의 기쁨과 전후 국가 재건 과정을 거쳐 국가적 자긍심을 떨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까지 격동의 20세기 한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손기정 선수의 육성 음반 말고도 처음 공개되는 여러 희귀자료들이 눈에 띈다.
1896년 미국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취입한 ‘애국가’ ‘아리랑’ 수록 음반,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독립 연설 ‘조선 청년에게’ 육성 음반,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많은 히트곡을 남긴 작곡가 박시춘의 친일가요 ‘지원병의 어머니’ ‘아들의 혈서’, 월북 무용가 최승희가 노래한 재즈, 영화 ‘아리랑’의 감독 겸 배우 나운규가 여러 배우들과 함께 대사를 녹음한 연극 ‘말 못할 사정’등 일제시대 음반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1896년 미국 내 한국 노동자들의 음반은 한국인이 취입한 것으로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평면형 유성기 판이 나오기 전의 형태인 에디슨 원통형 음반이다. 최승희의 재즈 음반에는 그가 직접 작곡한 ‘향수의 무희’도 들어있다.
전시는 역사의 소리, 삶의 소리, 아리랑의 소리, 고통의 소리, 해방의 소리, 희망의 소리 등 크게 6개의 주제로 공간을 구분, 주제마다 대표적인 음반을 골라 총 60종을 내놓는다. 일제강점기 유성기 판에는 시대의 아픔과 굴곡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그 시절 전국민을 울렸던 명창 임방울의 ‘쑥대머리’(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는 대목), 일제의 만주 침략 야욕을 찬양하는 유행가 가수 채규엽의 ‘북국오천삼키로’, 일제의 정책에 따라 일본어를 국어로 배우던 때의 ‘보통학교 국어 독본’ 낭독 음반 등이 그러하다.
이밖에 ‘애국가’와 ‘한국 환상곡’의 작곡가 안익태가 직접 지휘한 1957년 미국 할리우드 보울 오케스트라 연주 실황 ‘한국 환상곡’, 일제 때 성악가로도 활동했던 월북 작곡가 안기영이 피아노 반주로 부른 가곡,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 등도 만날 수 있다. 전시에서 옛 음반들은 유성기로 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일부 음원은 CD로 복각, 기념음반으로 판매도 한다. (02)580-3130
오미환기자 mho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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