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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작가대회/ 소설가 신경숙씨 방북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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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작가대회/ 소설가 신경숙씨 방북기 (하)

입력
2005.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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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백두산은 장관이었다. 백두산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한번 보는 것으로 다 덮어졌다. 신새벽 눈앞의 백두산은 장엄했고 천지는 신령스러웠다. 전날 밤부터 항아리만 하게 떠 있던 둥근 달이 지지 않고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곤 곧 붉은 햇덩이가 솟아올랐다.

남과 북 작가들이 작품을 낭송하는 ‘통일문학의 새벽’은 둥그런 해와 달이 공존하는 하늘 밑에서 진행되었다. 한겨울같이 추웠으나 천지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햇덩이가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해와 달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그 황홀한 순간엔 추위도 없었다.

각각 제 빛으로 찬란한 백두산의 해와 달 아래서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해 보려 했으나 수만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통에 나는 일관성 있게 통일을 기원하지도 못했고 만세를 부르지도 못했다.

다만 웅변적인 목소리로가 아니라 나직하게 낭독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여 들었다. 이렇게 추운데 동료 여성작가는 사회를 보느라 주머니 속에 손을 넣지도 못하고 마이크를 쥔 채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채로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이따금 바라보았다.

묘향산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도로에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리 일행들이 타고 있는 차량만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백두산 정상을 오를 때나 어디에서나 느낀 바지만 삼림이 우거진 북쪽 풍광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 속에 제 힘으로 피어난 야생화들의 자태는 시종일관 다정해보였다.

버스차창 바깥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 차량을 발견하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만세는 못 불렀지만 어디서든 사람들을 보게 되면 버스 안에서 손은 꼬박꼬박 흔들었다.

비록 버스 유리창 안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하는 말, 예를 들자면 “나는 김정일 장군을 아버지로 생각하는데 남쪽에서는 대통령을 아버지로 생각하십네까? ” 같은 질문을 공식석상이 아닌 사적으로 만나도 하는지? 버스 바깥의 도로를 걸어 다니는 일반인들도 그런 질문을 서슴없이 하는지 알고 싶었다.

드디어 묘향산의 장대한 골에 천년의 세월을 품고 서 있는 보현사에 들어갔을 때 깊은 숨이 나왔다. 바로 전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에서 받은 선물을 전시해놓은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하고 난 뒤라서였을 것이다. 관람하는 내내 나는 진땀이 났다. 내겐 보현사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보현사의 어느 툇마루에 앉아있던 시간은 내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여겨졌다.

불자도 아닌데 예불을 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예불을 보았다. 형식을 알지 못하니 내 마음대로 절을 하고 내 마음대로 앉았다. 그 내 마음대로를 며칠 만에 해보는 거였다. 말을 붙여볼 엄두도 안 나게, 어디서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모르게, 아, 우리가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었구나.....분단의 세월을 절감했다.

간절하게 일정 중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기원했다. 통일이 늦춰지면 점점 더 그 간극을 더 메울 길이 없어보였으므로. 이 소통의 괴로움을 뚫어나가는 길은 그래도 자주 만나 이야기 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며 보현사에서 자비롭게 웃고 있는 분을 탓하듯 통일을 기원했다.

만날 수 있으면 무조건 만나야만 할 것 같다고, 조건을 달지 말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정하지 말고, 누구라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남쪽의 내가 북쪽으로 갔듯이 북쪽의 그들도 남쪽으로 와서 보고 느끼게 해달라고. 내가 이 도시에서 욕망의 덩어리로 살다가 이따금 내 태생지에 다니러 가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드는 생각. 도시로 돌아가면 검소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거기서도 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검소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북으로 가기 전날에 약국과 인사동을 들렀었다. 약국에서는 여러 가지 의약품들을 세트로 해서 다섯 묶음을 만들었고 인사동에선 살구나무로 만든 죽비 비슷한 나무안마기 다섯 개와 양산 다섯 개를 샀다.

의약품과 양산은 권장선물이었으나 나무 안마기는 내가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때 목과 등이 아플 때면 두들기는 것인데 괜찮길래 북에서 작가들을 만나게 되면 주어야지, 생각하며 샀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나는 그쪽 작가들을 두 번의 공식석상, 그것도 내 테이블에 앉은 사람 이외에는 만날 수 없었다.

떠나기 전날 밤, 북에 가기 전까지 써주고 가기로 한 내 책 개정판 발문 쓰는 걸 포기하고 새벽4시까지 포장한 의약품과 책은 나중에 한꺼번에 수거를 해갈 때 거기에 내놓고 나무 안마기는 쓰는 법을 직접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이게 뭘까? 생각할까봐 내놓을 수가 없었다.

한 개는 말을 걸 수 있고 또 느낌이 좋았던 미주에서 온 우리 팀 나이 드신 선생님께 드리고, 또 한 개는 버스를 타면 내 옆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얘기를 주고 받았던 동료에게 주고, 세 개는 그냥 가져왔다. 길만 건너면 되는 강냉이 국수집은 버스로 어딘가로 이동 할 때마다 버스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왔다. 그래서 강냉이 국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끝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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