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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유쾌하지 못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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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유쾌하지 못한 경험

입력
2005.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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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노태우 대통령과 신문사주 4명이 모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갑자기 A사장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각하, 제 술 한잔 받으시죠."

A사장은 술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잔에 따랐다. 대통령은 당황했다.

"아니 편하게 앉으시죠."

"아닙니다.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옆의 B사장이 "각하, 각하, 하는 것은 옛날 호칭 아닙니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A사장은 얼굴을 붉히며 "나는 일제 때 교육을 받았으니 옛날 식으로 하는 것 아니오. 해방 후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 하고는 다르지"라고 응수했다.

B사장은 "어린애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나도 환갑이 내일 모레입니다"라고 발끈하며 위스키 한 병을 따로 시켰다. B사장은 양주병을 들고 대통령에게 "자, 제 술도 한잔 받으시죠"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다투지 마시고 즐겁게 마십시다"라고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지자 대통령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대통령이 나가자 A사장은 B사장에게 화를 냈다. "아니 이 사람, 나는 자네보다 인생 경험도 많고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데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나. 나는 자네 아버지한테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 B사장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아버님까지 들먹거릴 필요는 없지 않소"라고 하자 A사장은 "뭐라고. 이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너 혼 좀 나볼래"하고 되받았다. 급기야 A, B사장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것을 다른 사장들이 말려 술자리가 끝났다.

이날 다툼의 계기는 A사장이 노 대통령에게 "방미 기사가 작게 취급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언론계 대표로서…"라는 말을 덧붙여 경쟁사 B사장의 기분을 상하게 한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_E신문 2001년 4월9일자.

두 사람은 지금도 건재하고 그들의 신문은 이른바 '빅3'중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16년 전 '추태'를 다시 들추어 낸 것은 요즘 상황이 그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MBC에 의해 열려진 '안기부 X파일'은 충격적이었다. "누가 그랬다 하더라"식의 소문과 추정이 막상 실명과 대화록으로 적나라하게 까발려졌을 때 그 파괴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국내 최대 재벌총수의 처남이자 잘 나간다는 신문의 오너가 "15개(15억원)는 둘이서 움직일 만 했는데 30개(30억원)는 조금 힘들더라"고 말해 직접 배달원 노릇까지 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에서는 비애마저 느껴졌다.

A사장은 80년 언론통폐합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5공언론 청문회를 겪은 후 자신의 회사 사보를 통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언사가 도청 당하고 만천하에 까발려진 사실이 일생일대에 걸쳐 대단히 유쾌하지 않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유쾌하지 않은 쪽은 국민이다.

그 신문의 독자는 배신감마저 느낄 것이다. 유쾌하지 않기는 기자도 마찬가지다. 같은 업의 종사자로서 낯이 뜨겁고, 국민의 눈에 자칫 한통속으로 비쳐질 신문 전반의 신뢰성 위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될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가 결국 대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뒤 몇 시간이 지나 서울에선 문제의 X파일이 유출 악용된 경위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는 이제 국민을 향해 "그것이야말로 추악한 이면이요"라고 외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은 동정표라도 얻으려면 'X파일에 담긴 진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서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송태권 경제과학부장 songt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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