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현재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역병(疫病)과도 같은 것이다. 실연(失戀) 따위는 차라리 낭만적인 병인(病因)이다. 생계, 불화, 강박, 또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사람들은 줄줄이 제 목숨을 버린다. 삶을 새털처럼 보는 세태를 다들 개탄하지만, 어쨌든 당사자가 느낀 현실의 무게감은 목숨보다 훨씬 암담했을 터이니.
극단 골목길의 ‘눈사람’은 자살하는 현실에 대한 첫 연극적 대응이다. 극은 집단 자살자들의 마지막,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의뭉스러우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인터넷에서 자살을 모의하다 뜻이 통해 드디어 만나 실행을 코앞에 둔 세 남녀의 이야기다.
“수면제를 먹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리고 죽는다. 이게 우리들의 계획이야.”망해버려 부장이 자살한 어느 회사에 다니던 중년 남성이다. 옆에 있는 사람은 팔뚝에 수많은 자해의 흔적이 있는 아가씨. 불법 주차 딱지를 붙이며 살아 보려 했으나, 이제 그 마지막 의지마저 놓아 버렸다.
재수생은 이질적이다. 강남에 사는 그는 콜택시를 대절해 약속 장소인 만화방까지 왔다. 그 와중에도 만화방에 있던 컴퓨터를 켜 ‘싸이질’을 하는, 전형적인 요즘 10대다. 극히 이질적인 이들을 묶어 주는 것은 단 한 가지. “어떻게 죽든 함께 하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소주에 수면제 타먹기다.
소나기 퍼붓던 그날은 서로 채팅상의 ID로만 알고 있던 그들이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는 날이자 세상에 결별을 선언하는 날. 서울 근교의 산 속에 가서 “폼 나게 죽자”던 그들은 자기네를 차로 실어주겠다던 사람이 차가 고장 나 못 오게 됐다는 연락에 계획을 바꿔 만화방에서라도 죽으려 한다.
인터넷으로 만난 이들은 서로를 ID 이상으로는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게 편하다. “우린 운이 좋은 사람들이야. 시대를 잘 만난 거지. 인터넷이 없었다면 이렇게 모이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사이버 문명의 몰가치성이다.
2005년 신예 황복구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입선작을 무대화했다. 서울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만화방을 고스란히 옮긴듯한 이 연극은 일상 속의 끔찍함이 기괴스럽기까지 하다.
중년남이 힘겹게 들고 온 등산 배낭. 알고 보니 어린딸의 시체다. “내가 가면 내 딸은 누가 지켜? 엄마도 없는데 내 딸은 누가 먹여 살리냐구!”어린 자녀와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이기도 하다. “남의 손에서 사랑도 못 받으면서 살게 하고 싶진 않았다구.”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갈수록 줄어드는 GNP 순위 11위 국가 한국을 보는 연극의 시선이다.
극의 사실성을 높이려는 연출자 박근형의 의도로 무대 전면에선 성능 좋은 온풍기가 1시간10분 공연 내내 돌아간다. 박씨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객석을 메운 관객 누구도 언짢은 기색이 없다. 한여름의‘뜨거운 무대’를 맛 보지 못 한 사람들은 올 겨울의 재공연 무대를 기대할 수 있다.
최정우 박윤경 이대관 출연. 8월 5일까지 김동수 플레이하우스. 화~금 오후 7시30분, 일 3시.(02)3675-4675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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