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친한 친구에게 쏟아낸 상사에 대한 불만이나 배우자에게 속삭인 달콤한 대화를 누군가가 엿듣고 있다면….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언론사 사주와 굴지의 기업이 연루된 이른바 ‘X파일’ 때문에 도청 공포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집요하게 정보를 빼내려는 ‘정보 도둑’과 이를 막으려는 화자 사이의 전쟁은 ‘암호학’을 발달시켰다.
광케이블을 타고 흐르는 인터넷 세상의 정보를 빼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수 많은 정보는 ‘받을 사람-보내는 사람-정보’로 이뤄진 패킷(다발)으로 인터넷 바다를 떠돌다가 적합한 ‘받을 사람’을 찾아 전달된다. 정보가 도착할 곳(받을 사람)인 척 위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낸다면 정보를 낚아채는 것이 가능하다. 해커들 사이에 흔히 쓰이는 이 기술은 ‘패킷 스니핑(sniffingㆍ냄새 맡기)’라고 불린다.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으로 된 휴대폰에서 통신 내용을 도청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통신업계 관게자는 “CDMA는 휴대폰 송신 주파수가 계속 변하는 방식으로 휴대폰 시리얼 번호를 소스(sourceㆍ정보원)로 사용한다”면서 “이 번호를 알아내 주파수를 잡아내면 통신 내용을 엿들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송신 휴대폰-기지국…기지국-수신 휴대폰’으로 이어지는 통신 과정에서 기지국 사이에는 유선 방식으로 정보가 이동해 상대적으로 정보를 낚아채기가 쉽다.
이처럼 산재한 도청 위험을 보다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메시지 자체를 암호화하는 방법이 쓰인다. 가장 기초적인 암호는 ‘치환법’으로 A는 1, B는 2와 같은 방식으로 각각의 단어나 글자에 상응하는 기호를 정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간편하긴 하지만 반복되는 글자를 꼼꼼히 살피다 보면 암호를 결국 풀 수 있다는 단점 때문에 중요한 정보 전달에 오랜 기간 사용하기는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줄의 암호를 섞어 순서대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 강구됐지만 해독 시간을 지연시키는 수준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 아울러 ‘암호키’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를 누군가 훔쳐 복사해둘 수 있다는 위험도 존재한다.
이 같은 단점을 보완, 1976년 미국 스탠포드대 마틴 헬먼 박사 등이 발명한 현대 암호는 ‘공개키’와 ‘비밀키’ 방식으로 작동한다. 치환 방식이 송신자-수신자가 하나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나눠 갖는 셈이었다면, 공개키 방식은 하나의 열쇠 및 자물쇠로 정보를 전달한다. 메시지를 받을 사람이 ‘열린 자물쇠’가 달린 상자를 보내면 송신자는 여기에 내용을 담아 자물쇠를 채운 후 이를 다시 보낸다. 자물쇠와 열쇠의 ‘정교함’은 이를 만드는데 사용된 수학식의 난이도에서 비롯된다.
중간에서 누군가 자물쇠를 훔친다 해도 자물쇠만 보고 열쇠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방식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져 왔다. 과학기술부 광혼돈현상제어연구단 김칠민 단장(배재대 전산전자물리학과)은 “컴퓨터 연산 속도가 나날이 빨라지면서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자물쇠(공개키)가 깨지고 있다”면서 “미 국가안보국(NSA)에서는 냉전시대부터 각국의 암호 통신 기록을 모아두고 있으며 현재 개발 중인 양자 컴퓨터까지 완성되면 수많은 진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김재완 교수는 양자 컴퓨터의 놀라운 세계를 윷놀이에 비유해 설명했다. ‘비트’를 사용하는 디지털 컴퓨터가 ‘윷이 바닥에 떨어진 상태에 따른 경우의 수’를 사용한다면 양자로 이뤄진 ‘큐비트’는 윷이 던져진 순간부터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의 수 많은 ‘가능성’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디지털 컴퓨터 100개를 연결하면 최대 100배의 속도밖에 나지 않지만 같은 경우 양자 컴퓨터의 속도는 2100으로 늘어난다”고 말했다.
양자 컴퓨터의 개발로 현재의 모든 암호 시스템이 깨질 날이 가까워옴에 따라 과학자들은 이에 상응하는 ‘양자 암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양자의 본질은 ‘들여다보거나 건드리는 순간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암호 제작에 사용하면 중간에서 누가 낚아채려 하는 찰나 성질이 변해버려 도청 여부를 금새 알아챌 수 있게 된다. 김 교수는 “양자 관련 학회마다 NSA 관계자들이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만 봐도 미래의 암호학이 양자 중심으로 돌아갈 것을 알 수 있다”며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가 유발할 암호 제작 및 해독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광혼돈현상제어연구단 계원호 박사(현 특허청 심사관)와 김칠민 교수팀은 최근 양자 다발의 기울기를 임의의 각으로 회전시키는 방식의 새로운 양자 암호기술을 개발, 물리학 분야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 최신호에 게재하기도 했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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