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일 평양과 백두산 묘향산에서 열린 ‘6ㆍ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가한 소설가 신경숙씨의 방북기를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편집자주
우리가 평양에서 묵었던 호텔은 고려호텔이다. 도착해 호텔에서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이번 행사의 본대회가 시작되는 인민문화궁전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아서 맞은편 간판들을 쭉 살펴보다가 한쪽 구석에 ‘강냉이 국수집’이라고 써 있는 간판을 발견했다.
수많은 국수들이 있으나 강냉이국수는 들어본 바가 없어서 강냉이 국수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 내 뒷자리에 앉은 북측 안내원에게 강냉이 국수가 뭐냐고 물었더니 강냉이로 만든 국수지 뭐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렇지. 강냉이 국수이니 강냉이로 만든 국수지. 밤에 야참으로 강냉이 국수나 한 그릇 사먹어야겠다고 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실어갈 고려항공이 인천공항에 늦게 도착한데다 북측 문인으로 참가한 작가들 중에서 해외에서 온 작가들을 대표작가로 하느냐 초청작가로 칭하느냐는 문제로 또 시간이 지연되어 원래 3시쯤 열리게 되어 있던 본 대회가 시작된 건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때 북측 작가들을 처음 보았다. 내 옆 자리에 앉은 작가는 시인이었는데 생각보다 우리 작가들과 작품들을 상당히 정독했음을 알고는 놀랐다.
북의 작가들 작품을 별로 알고 있지 못하는 나는 미안한 마음까지 생겼다. 본 대회는 열기가 있었다. 출발 전에는 듣지 못했던 통일 문학상 제정선포식이 있었고 양쪽 작가들의 통일을 위한 문학을 애쓰자는 다짐이 이어지며 시종일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본 대회에 이어진 환영연회의 음식도 맛있었을 뿐 아니라 처음 마셔본 들쭉술의 영향 때문인지 그 쪽이나 우리나 무엇이 다른가? 싶은 마음이 들어 얼마간 긴장했던 마음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나는 낯선 곳에 가면 새벽에 주변을 산책을 하는 게 취미이므로 다음날 새벽에 호텔문을 밀고 나와 두리번거렸는데 북측 안내원이 다가왔다. 주변을 좀 걸어 다녀볼까 한다고 했더니 그냥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길이 직선으로 훤하게 뚫려 있어서 길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해서 조금만 산책하겠다고 했더니 또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아, 여기가 여행지가 아니구나, 북측이구나, 실감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랬어도 버스 안에서 본 평양시내는 내가 다 아는 거리 같이 소박하고 정겨웠다. 마치 옆집에 놀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를 만 나면 다시 아, 여기는 북측이지, 실감하고 다시 ‘남새점’ ‘옷점’ ‘팔골리발(팔골리에 있는 이발소)’ 이란 간판을 만나면 배시시 웃다가 고갤 들어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거대한 표어를 만나면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본래의 우리말 뜻은 북쪽에 많이 남아 있었다. 평양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쓴 입국 신고서의 ‘난날 (태어난 날)’ ‘따로 부친짐’ ‘손짐’ 이란 표기들을 비롯해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 승무원의 “섭섭해도 뒤에 앉은 사람부터 내려야겠습니다” 라는 말씨는 매우 정다웠다. 항상 앞에 승무원들은 항상 앞에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붙였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자체가 우리하고 쓰임이 다른 듯 했다. “미안합니다”는 남쪽의 “실례합니다” 아닌가 싶다.
이렇게 나름대로 편안했던 내 마음이 연민과 슬픔으로 얼룩졌던 순간은 옥류관에서 냉면으로 점심을 한 후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였다. “미제가 덤벼든다면 지구상에서 영영 쓸어버리자”라는 거대한 표어가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앞에 붙어 있었다. 안내원이 안내한 첫 방에서는 어린 소녀들이 발레를 하고 있었는데 소녀들이 얼굴에 짓는 미소를 접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었다. 어쩌나, 싶었다. 저건 아이들이 짓는 미소가 아닌데, 싶었다.
계속 이어지는 아이들의 춤과 노래, 수예 놓는 모습, 피아노 치는 모습, 가야금 뜯는 모습을 차례로 보는 시간 내내 마음이 무겁다가 영화 ‘패왕별희’의 한 대사가 스쳐 지나갔다. 영화 속에서 경극을 너무 잘하는 동무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며 소년이 내뱉은 말 “얼마나 맞았으면 저렇게 잘할까?” 아이들은 너무 잘하는데 아이들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내 마음은 칼로 긁힌 것 같이 쓰라렸다. 너무 잘하는 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짓고 있는 미소가 너무 똑같아서, 그 더운 날에 그 덥고 공기가 안 통하는 옷감으로 치장을 하고 누가 봐도 전시용인데 그걸 자랑스레 관람하게 하는 자신감이 공포스러웠고, 무엇보다 대상이 아이들이라는 게 속상했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은 북의 모든 소년 소녀들의 선망의 궁전이라고 한다.
평양 같지는 않겠지만 각 지방마다 축소판 소년궁전이 있을 것이다. 남쪽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너무나 다르게 자란 그들이 앞으로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의 일이 까마득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어느 방에선가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난 후 누군가 앙코르를 신청했다. ‘찔레꽃’을 불러 달라 했다. 이미 무슨 노래는 누가 부르고 무슨 노래는 누가 부르는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찔레꽃’이라는 제목이 나오자 한 소녀가 나와 ‘찔레꽃’ 을 불렀다. 기가 막히게 구성지게 부르는데 내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앙코르를 신청한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이 너무나 미웠다. 노래를 듣고 있는 나도 미웠다. 그 방에서 관람 온 사람들을 향해 항상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할 소녀에게 앙코르를 신청해 한 곡을 더 하게 하다니, 하는 마음이었다. 각 방을 먼저 구경하고 대극장에서 모여 소년소년들의 정식 공연을 보게 되었을 때 어느 순간부터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옆 사람 몰래 우느라고 혼났다.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박수를 칠 수도 없었고 웃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 뒤에 숨어있는 체제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 미소를 소녀가 아니라 처녀가 짓고만 있었더라도 그리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