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 주미대사가 26일 사임했다. 반년도 못 채운 5개월3일만의 중도하차다. 부유한 집안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거대언론사까지 소유해 부와 명예를 모두 쥔 그였지만 X파일 파문은 그의 처지를 180도 바꿔 놓았다.
주미대사를 발판으로 큰 그림을 그리던 그의 야망도 이제는 빛 바랜 청사진이 됐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유엔사무총장의 꿈은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접게 됐다.
그는 주미대사로 부임하기 전부터 “잿밥에만 눈이 어둡다”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유엔사무총장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6자회담을 불과 열흘 앞둔 시점에서 그는 “정부결정이 나는 대로 9월 경 출마를 가시화할 생각”이라며 조바심을 냈다.
일각에서는 “유엔 사무총장은 카드였을 뿐 그의 진짜 목표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번 일로 물거품이 됐다”는 애기도 나온다.
KS(경기고ㆍ서울대) 출신인 홍 대사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를 취득하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ㆍ내무장관을 지낸 고 홍진기씨의 장남이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는 처남이다. 홍 대사는 1985년 귀국해 재무장관 비서관,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 등을 잠시 지냈다. 86년 삼성코닝 상무를 시작으로 전무, 부사장을 거쳐 94년에는 선친이 경영했던 중앙일보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홍 대사의 정치적 야망은 제2창간을 선언한 중앙일보의 사세확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구체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97년 대선에서 실행에 옮겨졌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 언노련은 그가 주미대사로 내정되자 “그는 97년 대선에서 특정 정당과 후보의 기관지 이상의 노릇을 하며 중앙일보가 언론이기를 포기하는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며 “만약 이회창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그는 이회창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됐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이회창 총재가 완벽하게 지배했을 한나라당의 2002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섰을지도 모른다”는 성명을 냈다.
언노련은 홍 대사의 중앙일보 경영에 대해서도 “삼성그룹의 천문학적 지원을 배경으로 온갖 불법, 탈법적인 방법으로 경품과 무가지를 뿌려대며 우리나라 신문시장과 언론계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홍 대사는 중앙일보를 소유한 오너임에도 이번 파문이 워낙 커 한동안 중앙일보의 경영일선에 복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상당하다. 97년 대선당시 중앙일보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삼성의 돈 심부름을 직접 했다는 X파일의 내용도 치명적이지만, 검찰 수사결과에 따라선 보광그룹 탈세로 구속된 99년에 이어 또 한번 법적 수모를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올해 730억원의 재산을 신고할 당시 드러난 부동산 구입을 위한 위장전입 사실도 짧은 주미대사 경력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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