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출간된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소설 ‘돌의 집회’(이상해 옮김, 문학동네)를 이제서야 읽었다. 511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2시간30분. 중간에 잠깐씩 책에서 눈을 뗀 시간을 감안한다면 채 8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동물행태학과 심리학, 중앙아시아의 민족학과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 및 반(反)68세대의 정서까지 읽을 수 있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스피디한 전개와 의외의 결말에 있다.
선풍기 바람 앞에서 뒹굴며 모기에 물린 허벅지나 긁으면서 읽더라도 이미 넘긴 페이지를 다시 들추게 될 염려는 없지만, 약간의 집중력을 더 발휘한다면 작가가 깔아놓은 다양한 복선들이 의외의 장면에서 반전의 열매로 살아나는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모의 미궁이라 할 수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피’ 등의 매체에서 주로 과학적 현상을 주제로 한 르포를 썼던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1994년 ‘황새의 비행’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마티외 카소비츠 감독의 영화로 더 잘 알려진 1998년 작 ‘크림슨 리버’로 확고한 평가를 받은 이후 프랑스의 존 그리샴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지만, 정작 그랑제 자신은 보르헤스나 체호프 등의 고전적인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그랑제의 소설은 심리 스릴러나 모험소설의 전형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동양 신비주의 사상을 비롯한 각종 박물학적 지식을 동원해 전혀 다른 차원의 심리 서스펜스와 독특한 세계관을 표출해 보인다.
그러한 지식의 전시는 잔혹한 살인을 일삼는 엽기 살인마의 이야기에 나름의 품격을 부여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는데, 전혀 무관한 듯한 지식과 정보들을 엮어 거대한 음모의 스토리를 구성해내는 역량이 그만의 특출한 작가적 특장임에 분명해 보인다.
‘돌의 집회’는 그랑제의 세 번째 작품으로 2000년에 출간되었다. 그해 여름 프랑스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작품은 소녀 시절 괴한에 의해 클리토리스를 절취 당한 이후 지독한 성관계 혐오증에 시달리는 디안 티베르주라는 여성이 서른 살을 맞이해 한 동양아이를 입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디안은 동양의 전통무술인 영춘권을 익혀 어떠한 완력 앞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런 그녀가 뤼시앙이라 이름 붙인 아이를 입양한 이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무슨 티브이 미니시리즈 안내문구 같은 요약이지만, 실제로 소설을 읽다 보면 미궁이라는 단어말고는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현란한 구성력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 책을 독파하는데 8시간 여가 걸렸다고 했던 바, 마치 곡예하듯 유연하면서도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펼쳐지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재미는 쏠쏠하다. 그건 존 그리샴 류의 영미 스릴러소설이 가지지 못한 프랑스 소설 특유의 개성과도 맞닿아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의 집회’ 가 우리나라에 출간될 당시 같은 출판사에서 그랑제의 또 다른 대표작인 ‘크림슨 리버’와 ‘검은 선’ 등을 계속 번역 출간할 예정이라 밝혔지만, 1년 여가 지난 지금까지 출간소식이 없다.
대신 최근 다른 출판사에서 그랑제의 네 번째 작품인 ‘늑대의 제국’(이세욱 옮김, 소담출판사)이 두 권으로 출간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 그 작품은 읽지 않았다. 어쩌면 ‘돌의 집회’처럼 출간된 지 1년이 지난 후에나 읽게 될 지도 모르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돌의 집회’를 읽고 나서 새삼스럽게도 프랑스 소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프랑스 소설은 여름에 특히 잘 읽히는 특징을 가진 듯하다. 그랑제 류의 스릴러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서늘한 현악 솔로를 연상케 하는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이나 미셸 투르니에의 감칠맛 나는 산문들도 여름에 읽으면 그 맛이 한층 더 짙고 풍요롭다는 생각이다.
로브그리예 등의 누보로망 계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건조하고 뻑뻑한 문체도 왠지 양념을 최소화한 음식들처럼 여름날 섭생에 적절해 보인다. 그건 방대하고 광활한 느낌의 러시아 소설이 겨울과 어울리는 것과 정반대의 특징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사춘기 시절 여름방학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다가 작고 어두운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그 뜨겁고 장황한 열기는 더위에 유독 약한 내게 지옥의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선풍기’ 역할을 했던 게 카뮈의 소설들이었다.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뫼르소의 최후진술이나 페스트에 점령당한 도시의 풍경 역시 덥고 뜨겁긴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만연체 문장에 질식해버린 내겐 그만한 심리치료사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차이는 우선 문체의 차이에 기인할 테지만, 그 문체가 형성된 문화적 환경적 요인들이 심리적 기온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건 단순한 소설 배경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토착적 체질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다. ‘사상의설과 관련된 문체의 온도 차이’ 어쩌구하는 개똥철학적 논문제목이 두서없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전혀 황당한 이론은 아닐 듯싶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요즘 우리나라에서 한창 잘 팔리는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작품은 가을에 어울린다. 코트 깃을 세운 중년의 미남이 사색에 잠겨 타자기로 빵을 굽는 장면은 아무래도 가을을 배경으로 해야 제격일 테니까. 이하 각설.
그런 맥락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프랑스 작가를 꼽아 보니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아멜리 노통브 등이 우선 떠오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니 호오를 따질 입장도 아니고 얘기할 꺼리도 없다.
베르베르의 경우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히는 게 좀 특이하다 싶지만, 아직까지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도 나로선 불가능한데, 굳이 따지자면 섬약하고 선병질적으로 보이는 그의 대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두자. 그에 비하면 아멜리 노통브는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25살에 천재 소리를 들으며 프랑스 문단에 등장한 이 당돌한 여성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듯 보인다. 정말 특별한 지 어떤지는 읽어봐야 알겠지만, 어쨌거나 다음 기회에 그녀의 작품을 언급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프랑스 작가 중 단연 ‘물건’을 꼽으라면 미셸 우엘벡을 들고 싶다. 2002년 겨울 ‘플랫폼’(김윤진 옮김, 문학동네)으로 처음 우리나라에 알려진 우엘벡은 이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투쟁 영역의 확장’(용경식 옮김, 열린책들)과 ‘소립자’(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등이 연이어 번역되면서 그만의 파괴적인 개성을 선보였다.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신랄한 조소를 보내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체계의 초안을 그리려는 듯한 우엘벡의 소설들은 흡사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광기에 찬 인물 군상들의 혈기방장한 사상적 궤변의 토론장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우엘벡의 소설은 철학, 과학,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의 혼성교배로 쓰여졌다.
특히 ‘소립자’가 그러한데, 소위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라 불리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꿈꾸는 우엘벡의 작가적 망상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상당한 충격을 던져줬다고 알려져 있다.
‘소립자’는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과도하게 섹스에 집착하는 형 브뤼노가 현대사회의 일면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하나의 원자라면 천재적인 과학자이지만 인간적 감정이 말살되어 있는 동생 미셸은 브뤼노의 반대극에서 인류의 미래를 예시하는 또 다른 원자라 할 수 있다. 같은 태 속에서 나와 전혀 다른 지점으로 분리된 이들을 통해 우엘벡이 결국 제시하는 건 현 인류의 궁극적인 종말에 의한 새로운 종의 출현이다.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케 하는 변태적 성 묘사와 세계종말을 희구하는 극단적인 과학적 종말론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엘벡의 소설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진지하게 맞부딪쳐볼 만한 강렬한 문제의식 속에서 쓰여졌다.
따라서 동의하긴 어렵더라도 무시하기는 힘든 흡인력이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다. 그건 원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의 작가적 이력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우엘벡은 ‘소설은 허구와 이론과 시를 결합하여 실존적인 쟁점들에 도달할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소립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전면적으로 투사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건 재작년 여름이었다. 강렬한 하드록을 들으며 방향 없는 열기에 빠져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내다본 창밖 풍경이 말할 수 없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우엘벡의 소설을 읽었던 여름날 저녁의 풍경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풍경은 모종의 망각상태에서 불현듯 들리?종소리처럼 아늑하고 깊었다. 그 순간 나는 방향 없이 공전하는 세계의 중심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에 오랫동안 치를 떨었다.
더위가 일순간 달아나는 그 때의 환청은 이 세계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영역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독서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엑스터시이자 가장 밀도 높은 슬픔의 중심에 다름아니다. 무더운 여름, 그 공허하고도 불가사의한 중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기대하며 나는 다시 책장을 넘긴다. 되도록이면 고등사범학교와는 별 상관없는 젊은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만을 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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