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공동선언은 살아 있었다. 핵 그늘에 가려져 침묵하던 그 선언은 5년 만에 가치와 효력을 드러냈다. 다시 평화를 꿈꾸고 통일에 대한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에 대한 부시 미 행정부의 ‘악의 축’ 발언 등 노골적인 적대감, 이에 질세라 터져 나온 북한의 핵 보유 선언으로 피가 마르는 듯하던 때가 엊그제였다.
북한과 미국이 위험천만한 공방을 계속할 때, 우리가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쓸 카드는 초라하고 무력할 뿐이었다. 다행히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주인인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엄숙하게 천명한 남북공동선언의 다섯 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달 평양에서의 5주년 기념행사가 적지 않은 정치적 열매를 거두게 한 것이다.
-남북, 다시 평화의 발걸음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때맞춰 남한이 북핵 폐기를 전제로 잉여전력 200kW를 북에 공급하기로 제안했고, 백두산ㆍ개성 관광 길도 열린다. 새로 합의된 경제협력까지 구체화하면, 남북관계는 개성에서 냄비나 만들어 와 팔던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남북은 다시 평화의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보수세력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인도주의적 지원마저 ‘북한 퍼주기’라고 비난하던 치졸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독일은 우리처럼 1945년에 분단되었다가 15년 전인 90년에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인들은 과거 서독이 동독에게 그러했듯이 무조건적으로 베풀라고 충고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통일비용을 줄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는 남한에게 조건 없이 국민세금을 통해 북한을 지원하라고 권한다. 그러면 미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분단으로 받는 고통은 남한보다 클 것이다. 도덕적 차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의 승리자로서 남한은 북한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 드 메이지에 역시 북한을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주민이 아사하는 판에 북한의 적화야욕이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외에 도로도 놔주고 철도도 놔주고 전기도 줄 수 있으면 주라.” 독일은 통일 전은 물론이고 통일 이후에도 약 1조3,000억 유로를 동독 지역에 쏟아 부었다. 1유로는 약1,230원이다.
다시 원점 부근에서 물어 본다. 큰 비용을 들여가며 남북이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 이 상태가 유지되는 한 분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분단과 남북대치로 인해 젊은이에게 부과되는 무거운 병역의무와 이를 피해보려는 온갖 편법들, 그것이 초래하는 계층적ㆍ사회적 갈등 등이 우리를 기회주의적이고 비이성적 국민으로 만든다.
우리에게 분단은 거의 모든 정치적 악의 근원이다. 국토분단 아래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정치적 부조리와 냉전적 사유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단은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 사상의 자유제한, 진보ㆍ보수세력 간의 불필요한 분란과 갈등을 조장했다. 그것은 또한 인권 탄압의 빌미로도 작용했고, 막대한 군비부담으로 국가적 성장이 막히는 바람에 나라가 강대국에 치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통일 없이는 우리가 결코 일류국가 국민이 될 수 없다.
-통일 없이는 일류국가 못돼
통일 방법은 물론 신중해야 하고, 비현실적 요인들을 경계해야 한다. 북한을 아낌없이 돕는 만큼 인권개선도 요구해야 한다. 평화를 다지고 통일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남북 군비축소 단계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겨우 핵 악몽에서 벗어나 제2의 해빙기를 맞기 시작했다. 평화와 통일은 특정 정당의 정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다급하고 절박한 실존적 요구다. 그런데 평화와 통일을 꿈꿀 수 있게 된 지금, 우리 언론과 사회는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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