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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기 지금] '반디앤루니스' 종로점 의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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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기 지금] '반디앤루니스' 종로점 의자 이야기

입력
2005.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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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자입니다. 그것도 가로 50cm, 세로 50cm에 등받이도 없는 조그만 의자입니다. 세상에 의자는 무수히 많지요. 그리고 앉은 사람, 장소에 따라 그 가치도 달라지지요. 사회적 상징으로 의자는 사람의 지위와 존재감을 나타내지요.

오늘은 저의 이런 작지만 소중한 의미와 존재가치를 말하려 합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서울 종로1가 한 건물 지하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4월 22일 문을 연 반딧불이의 반디와 라틴어로 달빛이란 뜻의 루니를 합친 반디앤루니스 서점의 소설 코너 한 구석에 있습니다.

서점의 의자라고 하니까 모르는 사람은 이곳 직원들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 테죠. 천만의 말씀. 저는 서점을 찾는 손님들의 것입니다.

서점에 무슨 의자냐구요? 도서관도 아니고. 저도 처음 의아했습니다. 서점이란 책을 파는 곳이고, 주인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야 장사가 되는데 의자가 있으면 책은 사지 않고 오랜 시간 읽기만 할 것이 뻔한데. 안 그래도 서서, 바닥에 앉아 책 읽는 사람들이 얄미워 죽겠는데. 더러워지거나 망가져 팔 수 없는 책은 또 얼마나 생기는데. 결국 제 생명도 몇 달 못 가 끝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제 덕분에 서점의 인기도 높아졌고, 흔히 서점에서 말하는 평균구매율(10명당 1.5명)을 웃도는 실적도 올리고 있습니다.

석 달 전 저는 동료의자 110여개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앉기를 주저했습니다. 앉아 있는 시간이 조금 길면 눈치를 살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렇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읽고 싶은 새 책을 골라 들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몇 시간이고 앉아서 읽습니다. 늘 저와 친구들의 주위에는 자리가 빌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시 숨돌릴 틈조차 없이 무거운 몸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저로서는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일주일 전부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서점을 찾는 손님이 무려 3만 명으로 세 배나 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곳은 너무 시원해, 연일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이보다 더 좋은 피서의 장소도 없지요. 어제만 해도 오전 9시 30분에 문을 열자마자 시작해 밤 10시까지 단 10초도 쉴 수 없었습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10여명이 릴레이하듯 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닥에 앉아 책을 본 사람이 이날 하루 5,000여명이나 됐습니다. 어린이코너의 제 친구(원형 소파)는 아이와 함께 온 엄마가 아닌 어른들까지 앉는 바람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합니다.

어제 나를 차지한 첫 주인공은 60대 초반의 할아버지였습니다. 전 눈 감고도 압니다. 그의 작은 가방에는 신문, 음료수가 들어있고, 소설 ‘바람의 파이터’를 11시까지 읽고는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는 단골이니까요. 물론 그는 책을 사는 법이 없습니다. 돈이 없거든요. 몇 년 전 일자리를 잃었나 봅니다.

그가 떠나자 ‘모모’란 책을 손에 쥔 30대 여성이 조심스럽게 앉았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약속시간이 남아 더위도 식힐 겸 잠시 들른 듯했습니다. 이따금 시계를 보더니 12시가 가까워오자 책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 그 학생이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서는 책을 읽고 가곤 하는 심선혜(숙명여대 문화관광학과)씨입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찾는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를 골랐군요. 용기를 내 궁금한 것들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답해 주었어요.

“책을 안 읽는 편인데 이 서점에는 자주 와요. 의자 때문이에요. 앉을 수 없어도 의자가 있다는 생각에 편안해요. 눈치 안보고 책을 읽으라는 얘기니까. 서점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된 기분이랄까. 공짜로 책을 끝까지 보겠다는 것은 아니예요. 읽다가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사요.

또 읽은 책들을 다른 사람에게 자신있게 권하기도 하고. 서점의 의자가 이렇게 책 읽는 문화를 만들고, 책을 보는 안목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뒤이어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손에 쥐고 앉은 회사원 강희욱씨도 “일부러 가까운 서점 두고 여기로 와요. 의자 때문이죠. 새 책, 구하기 힘든 책을 언제든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해주어 고맙죠”라고 하더군요.

그들의 말에 피로가 싹 가셨습니다. 저의 존재가 자랑스러워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예 하루 피서를 작정한 듯 추리소설 세 권을 한꺼번에 들고 앉은 욕심 많은 아가씨도, 두 시간 동안 앉아서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를 끝까지 다 읽는 끈질긴 청년도, 읽던 책을 놓고는 같은 책의 새 것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 가는 50대 주부도,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새로 나온 토익문제집을 열심히 풀어보는 취업준비생도, 어머니와 함께 와서 책 한 권 사고는 재빨리 만화책 들고 와서는 바쁘게 넘기는 이문초등학교 6학년 김요한군도, 퇴근시간에 무거운 가방 잠시 내려놓고 김용의 무협소설 판타지에 빠져보는 50대 샐러리맨도, 모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점의 의자로서 석 달을 보내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를 찾는 사람의 60%가 20대 여성입니다. 공연이나 영화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책 읽기에서도 단연 그들이 으뜸입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곧 한국사회의 주인은 여성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대현 대기자 leedh@hk.co.kr

■ '의자들 아빠' 김천식 대표/ "도서관 서점 만들겁니다"

물론 마케팅 전략이었다. 김천식(67ㆍ사진)대표로서는 주변에 두 개의 대형서점(교보문고, 영풍문고)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건설회사에 근무할 때 가 본적이 있는 싱가포르의 한 대형서점을 벤치마킹했다.

‘서점의 의자’는 사내에서부터 반대가 있었다. “책은 안 사고,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매일 공짜로 읽기만 하는 얌체족에게 방석 깔아주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김 대표는 그것까지도 “좋다”고 했다. “그런 사람도 졸거나 노는 게 아니라, 무슨 책이든 본다. 서점에서라도 책을 읽게 하자. 읽은 책의 내용을 머리 속에 담고만 있지 않고, 어디 가서 이야기할 것이다. 돈 없는 사람도 편하게 앉아 책 읽고 나중에 그 힘으로 돈 벌어 책을 사면 된다.”

의자가 너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는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소액 입장료만 내면 신간까지 마음껏 읽을 수 있고, 필요한 자료의 복사까지 가능한 대형 ‘라이브러리 북스토아’ 를 언젠가는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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