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곰이 하얀 눈밭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뒹굴며 누워있는 포스터가 있다. 옆에는 ‘공부하기 싫으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오래 전 미국의 소아과 병동에서 본 포스터인데 어린 환자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뜻에서 붙여 놓은 것 같다. 공부하고 싶을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미 공부가 스트레스로 작용했다는 것인데 아마 그 백곰은 나이 50에도 그대로 뒹굴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해야 착한 사람 되고 훌륭하게 될 수 있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면서 큰다. 특히 고교 평준화 이전에 자란 세대는 중학교부터 입시전쟁을 치르기 위해 공부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10대때 공부하는 이유는 대략 그 시대의 모든 대한민국의 청소년들과 대동소이했다.
고 1때 단 한번 내 의지로 주어진 궤도를 이탈했는데 5세 때부터 쳐오던 피아노 공부가 갑자기 일로 느껴져서 미술로 전환했다.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거라고 여기시는 사이 나는 산으로 들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미술은 틀리면 개칠(?)이라도 할 수 있는데 피아노는 손이라도 삐끗하는 날에는 대학입시에서 그 동안의 공부가 다 헛수고가 된다는 논리였지만 실은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그야말로 행복한 공부를 하기 위한 핑계였다.
사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일보사 주최 전국 학생 미술실기대회에서 덕수궁 석조전을 그려 가작을 한 이래 사생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줄곧 입선 이상은 해왔던 터라 그림만은 자신이 있었고 학교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수채화 유화 포스터 심지어 도자기까지 구우러 다니면서 미술 교사한테 소질을 인정 받았던 터라 쉽게 방향 전환을 했다.
대학은 응용미술과를 지원했다. 심오한 철학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순수예술에 비해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는 분야 같았고 그 중에서도 시각 디자인은 2D(평면)부터 섭렵한 후에 3D(입체)인 제품디자인이나 공예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시각매체를 통해 메시지 전달을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시각디자인은 피전달자가 느껴야 할 반응을 미리 예측하고 여러 디자인 요소를 조합하여 다양한 느낌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작곡가가 음표를 조합하여 곡을 만드는 과정과 흡사하기에 피아노를 공부한 덕도 볼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역 앞 양동에 있는 희성산업(현재 엘지애드)이라는 광고회사에 럭키그룹 최초의 대졸 여사원 공채로 입사하게 되었다. 2년 남짓 회사에 다니는 동안 대학원에 등록하고 결혼도 해서 1인 3역의 생활이 시작됐다. 첫 애도 낳고 대학원도 졸업할 즈음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대학 은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괜히 미국까지 따라가서 공부한다고 나서지 말고 타자나 열심히 배워서 하루 빨리 남편 공부 마치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 때는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서 타자를 열심히 배웠다. 그 당시 양쪽 집안이 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다가 한 학기 버틸 돈만 달랑 들고 용감하게 유학길에 나선 터라 나까지 공부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미국에 가니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재봉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동네 목사님께서 공장용 재봉틀을 유학생 아내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재봉틀을 빌려서 재단한 드레스셔츠 천을 박아주면 벌당 1달러10센트를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가사 시간에 이론으로 배운 재봉틀 실 꿰는 법을 기억해내면서 밤을 꼬박 새워 한 장을 박아놓고 보니 얼마나 오랫동안 주물렀던지 박은 자국이 꼬질꼬질 까맣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점차 솜씨가 늘어서 한 달에 300~400장씩 만드는 실력이 되었다. 어릴 때 배운 피아노 덕분에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지 실력이 금새 늘었다. 그래도 낮에는 아이 보고 밤에만 일하니까 아무리 빨리 해도 한 시간에 한 장 만드는 꼴이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300~400달러 되는 돈이 크게 보였지만 2년쯤 되니까 한국에서 석사까지 한 사람이 고작 시간당 1달러 밖에 벌지 못하나 싶어서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그 무렵 남편이 다니던 텍사스 오스틴대학은 대학 소유지에서 오일이 펑펑 나는 바람에 장학 혜택이 많고 학비가 싸서 돈 없는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매우 인기였다. 내가 만약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면 남편이 조교이기 때문에 배우자 혜택에 따라 학비가 거의 공짜였다. 학교 식당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면 시간당 3달러15센트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재봉일보다는 그게 훨씬 나아보였다.
그날부터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재봉일 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세 살된 아이가 놀아달라고 보채서 공부할 시간을 내려면 그 애가 장시간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음식을 차려주면 금방 먹고 또 놀자고 하니까 치리어스라는, 도너츠처럼 구멍이 난 조그만 시리얼을 젓가락에 꿰어서 먹으라는 과제를 주고 어린이 프로그램인 ‘세서미스트리트’를 틀어주었다. 그러면 먹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 틈을 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딸에게도 그 때 익힌 손놀림 훈련이 두뇌발달에 도움을 주었는지 지금도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다. 그렇게 틈틈이 토플과 지아르이(GRE) 공부를 해서 이듬해 텍사스대 대학원 미술실기석사과정(MFA)에 입학할 수 있었다.
83년 여름 입학허가서는 받았지만 당장 아이를 맡길 돈이 없어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학교에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첫 학기부터 월 200달러 짜리 조교를 하게 해주었다. 그 해 말쯤 지도교수와 대화를 하다가 내가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지도교수는 ‘디자인 실기에서는 박사과정이 없고 MFA가 최상위 학위이므로 한국에서 이수한 학점 때문에 미국에서 이수를 면해줄 수 있는 학점은 없겠지만 대신 석사과정(MA)을 마친 사람에게는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주니까 너도 강사를 할 수 있다’고 일러주셨다.
심지어 “마침 2학년 과목의 강사를 찾던 중인데 그것을 맡아서 가르칠 수 있느냐”고 하셨다. 영어가 아직 서툰데 어떻게 강단에 설 수 있느냐고 했더니 “시각디자인은 그야말로 시각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소통은 큰 문제가 아니고 지구의 반대편에서 배운 네게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걱정 말고 가르치라”고 했다. 겁은 났지만 정식으로 교원 대우를 해주고 교수 미전에도 출품하게 해주며 연구실까지 주는데다가 무엇보다도 한 과목 가르치는데 월 800달러를 준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 당장 한다고 했다. 그 때에는 남편도 박사과정 중 반 이상을 이수하여 강사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유학생 사이에서 갑부(?)가 되었다. 공부는 돈을 벌게 해주었다.
86년 여름 학교를 졸업하고는 인디애나 주 퍼듀대학 조교수가 된 남편을 따라 오스틴을 떠났다. 둘째 아이가 갓 돌을 지난 때라 6개월은 푹 쉬고서 12월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디자인회사에 취직했다. 미국에 매킨토시 컴퓨터가 막 보급될 때였는데 회사에서는 어느 날 디자이너에게 매킨토시를 1대씩 나눠주더니 그 날부터 모든 인쇄물을 컴퓨터로 디자인하도록 했다. 당시 컴퓨터 사용을 거부하고 T자와 로트링펜으로 하는 원고작업을 고집하던 40대 아트디렉터는 이듬해 ‘늙은 개는 짖지도 않는다’는 심한 모욕을 듣고 쫓겨났다.
나는 회사에서 시키는대로 따르면 컴퓨터로 디자인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매킨토시 활용법을 열심히 익혔다. 미국의 디자인 회사에서는 디자인 프로젝트가 맡겨지면 그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간배정계획표(Time sheet)을 쓰고 그에 따라 작업을 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시간에 맞춰서 일을 하면 디자인이 만족스럽지가 않아 집에까지 가져가서 하곤 했는데 매일 시간배정계획표를 쓰면서 4년간을 일하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신속하게 디자인하는 능력을 익히게 되었다. 회사가 강행한 덕분에 컴퓨터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이 회사에 다니던 시절을 돈 받고 공부하던, 축복받은 시기로 기억한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하루를 시작할 때면 마음 속에서 감사와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90년 여름,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나는 그 날로 짐을 꾸렸다. 은사님이 운영하는 기업로고(CI) 전문회사에 입사해서 대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디자인하다가 93년 12월에 이웃 아줌마가 신문에 난 교수채용광고를 일러주어 지원한 덕분에 이제는 가르치면서 배우고 있다. 작년부터는 서울대 에 신설된 디자인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같은 캠퍼스에 다니는 두 딸과 함께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에 도달하기까지 목표를 정해놓고 오지는 않았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썼다. 가끔 남다르게 더 빨리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는 후배나 제자들을 보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시각디자인이란 결국 대중에게 시각이미지를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든 그 과정에서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다 내 능력으로 축적이 된다. 그렇게 하는 공부는 가장 행복하고 성공한 삶으로 이어진다.
● 박진숙 세종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선정한 안전표지 60개 가운데 14개를 만들어 한국 디자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2003년부터 공공안내 그림표지 국가표준화 사업을 맡아 200개 그림표지를 만드는 것을 주도했고 이 가운데 6개와 8개가 각각 2004년과 2005년에 국제표준으로 채택되어 ISO 회원 국가 146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사용된다.
195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응용미술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텍사스오스틴대학교에서 미술실기석사학위(MFA)를 받았으며 94년부터 세종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ISO 그래픽 심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2000년 중소기업청 주최 전국 교수 창업 경연대회 우수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아이셋파트너즈를 창업, 타워팰리스 노량진주산㈜ 일진산업 등의 로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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