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검찰에 고발키로 함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 불법도청 사건은 검찰 수사로 결론지어지게 됐다.
그러나 검찰 고위층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아왔다는 의혹이 검찰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다 대부분의 혐의가 공소시효가 만료된 점 등을 고려할 때 검찰 수사가 순탄치는 않을 전망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수사방향은 크게 두 갈래다. 첫째는 ‘대기업-언론-정계’의 부패커넥션, 두 번째는 불법도청내용을 공개한 언론사의 위법성이다.
우선 홍 대사가 1997년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직접 삼성의 불법자금을 이회창 총재 등 대선 후보에게 전달해 주는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내용이 수사대상이다. 그리고 당시 삼성 자금이 각 후보에게 얼마씩 전달됐는지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97년 대선 때 ‘9룡’으로 불렸던 신한국당 후보 9명에게도 골고루 자금이 전달됐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혹들은 정치자금법(3년) 위반과 형법상 뇌물(5년) 혐의의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5,000만원 이상의 뇌물 수수자에게 적용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10년) 혐의로만 기소할 수 있다.
때문에 검찰이 특가법상 뇌물죄를 적용하기 위해 매진할 수 밖에 없으며 뇌물죄 성립의 전제 조건인 대가성을 입증하기 위해 ‘삼성의 기아차 인수’문제가 집중 수사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방송사가 보도한 도청내용 중에는,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당시 회장 비서실장)이 홍 대사에게 “기아는요?”라고 묻자 홍 대사가 “삼성이 갖고 있는 복안을 당당하게 밝혀 공론화시키면 당내 정책위에 검토시켜 가능한 한 도와주겠다고 한다”면서 이회창 후보측의 입장을 전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삼성이 자금제공을 통해 기아차 인수라는 대가를 얻으려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의 부임에 맞춰 “3~5개(3,000만~5,000만원)를 전달하자”는 대화도 도청내용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기아차 회생의견을 묵살하고 매각을 강행했던 강 전 부총리의 이후 행보와 녹취내용과의 연관관계도 밝혀져야 한다.
97년 대선에서 삼성의 자금이 이회창 총재의 동생 회성씨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은 전달자(홍석현 대사)의 신원만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이미 세풍 수사를 통해 상당부분 밝혀진 내용이라는 점도 검찰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세풍 수사에서 회성씨가 삼성측으로부터 6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지만, 당시 정치자금법 규정에 법인이 정치자금을 제공할 때 꼭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어서 기소가 안됐던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불법도청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들에 대한 수사도 지켜볼 대목이다. 통신비밀보호법상 불법도청을 한 안기부 직원의 공소시효(7년)는 지났지만, 최근 도청내용을 공개한 언론사들은 처벌대상이 된다.
삼성은 민형사상 소송제기를 준비하고 있으나 이 부분은 수사 자체보다는 판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에는 불법도청 내용이라도 공공의 이익과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는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처벌할 수 없다는 판례가 있지만, 국내에는 관련 판례가 전무한 실정이다.
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법도청에 대한 수사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통비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도청을 한 사람들에게 “음식점(도청장소)에 허락없이 침입했다”는 ‘주거침입죄’가 적용됐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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