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맨해튼’이라 불리는 테헤란로. 압구정동, 대치동 등의 고급 아파트촌과 함께 강남이 부자동네임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테헤란로. IMF 이후 국내의 부동산에 몰린 외국의 투기자본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 테헤란로. 1995년 이후 최신 경향으로 지어진 고층건물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테헤란로. 1995년 이후 고층건물이 가장 많이 선 곳. 강남의 도로 가운데에서도 하루 종일 가장 밀린다는 테헤란로. 빌딩의 평당 임대료가 가장 비싼 곳 가운데 하나인 테헤란로. 한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들이 몰려있는 테헤란로. '한강의 기적'을 마지막으로 보증해주는 훈장, 테헤란로. 이상이 테헤란로에 따라 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정리 해보자. 테헤란로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들은 모두 돈과 관계된 것이다. 테헤란로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싸고 크고 많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항상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가 따라 붙는다. 근대 도시에서 돈은 곧 높이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일단 높은 건물로 채운다. 그래야만 뭔가 있어 보인다. 하늘을 뒤덮는 스카이라인을 가져야 그 도시가, 나아가 그 나라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때는 콘크리트 공장 열심히 돌리고 제철소에 쇳물 열심히 부어대 철골을 뽑아내는 시기이다. 여유가 좀 생기면 그 다음에는 모양에 신경을 쓴다. 스카이라인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높이를 확보했으면 그 다음에는 멋을 부려야 한다. 서양에서 유행하는 온갖 최신 양식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테헤란로는 우리나라에서 이 두 단계를 가장 농축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가장 많은 물량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높이와 덩치만 자랑하는 1980년대식의 촌스러운 건물과 1990년대 이후의 첨단 양식 건물이 뒤섞이며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가운데 후자의 건물이 두드러지며 테헤란로를 대표하는 수식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현상인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양식의 고층 건물들은 테헤란로를 테헤란로로 만드는 일등공신임에 틀림없다.
후기 자본주의의 건축방식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는 놔두고 문제점만 따져보자. 한 마디로 테헤란로는 우리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테헤란로에서 멋깨나 부렸다는 건물들은 대부분 외국 자본 소유이다. 그것도 악성 투기자본들이다. 이 건물들 자체, 거기에 들어있는 외국 회사들, 그리고 이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투기자본들이 어떤 속성의 존재들인지는 최근 불거진 탈세 사건들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본만 이런 것이 아니다. 바늘과 실은 함께 가는 법. 테헤란로에서 조금이라도 멋있고 특이한 건물은 모두 외국 설계사무소의 작품들이다. 그것도 이런 식의 부동산 건물만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도면공장 같은 극단적으로 상업화된 설계사무소의 작품들이다. 테헤란로의 화려함은 우리가 꾸민 것이 아니라 남이 꾸며준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좋다는 설계사무소들은 이들의 하청업체 역할을 한다. 관청 상대로 로비해주고 공사에서 인부들 말 잘 듣게 부리는 일 등을 해주는 것이다. 건물 주인도 외국이요, 건물을 설계한 사람도 외국이요, 건물에서 임대료 챙겨 가져가는 것도 외국이니 우리는 땅만 내주고 남의 잔치에 멍석만 깔아준 셈이다. 이것을 과연 온전한 우리의 스카이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건물 양식을 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그야말로 20세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하나 같이 하이테크나 네오 모더니즘 같은 최신 유행 디자인들이다. 그러나 이런 양식들은 이를테면 세계화나 소비 자본주의에 해당되는 건축양식으로 서양 내에서도 자기들끼리 문화적 예술적 건강성을 가지고 논쟁이 분분한 양식이다. 이것이 미국 내에 머물 때는 소비 자본주의 아래에서 불필요한 소비를 야기하는 문제에 국한된다. 그러나 미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수출 될 때에는 세계화의 문제로 커진다. 세계화를 전파하는 건축 분야의 선발대가 되는 것이다. 자본과 설계사무소가 환상의 파트너를 이루어 투기자본을 세계적으로 침투시키는 침투조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이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설계사무소들은 미국의 투기자본과 공공연한 협력업체를 이루어 제3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자본의 투입 경로를 닦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협력관계는 없다.
서양, 좁게는 미국의 도시들조차도 이미 20세기 초반 모더니즘 시기부터 고층건물에 자국만의 전통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양 각국은 자국만의 민족주의 양식을, 그것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이런 양식은 세계보편적 산업양식의 건물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며 21세기 후기 자본주의 건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테헤란로에 지어지는 최신 유행의 양식들도 말이 좋아 세계주의 양식이니 지구보편적 산업양식이니 하지, 실제로는 서양의 지역주의 양식에 가까운 측면이 많다. 결국 서양은 현대 산업 기계 문명의 주인임을 건축양식으로 여실히 증명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주의 양식의 창출에 참여하지 못한 채 이 양식을 외국자본과 외국 설계사무소의 손을 빌려 우리 땅에 짓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만의 전통 양식이나 지역주의 양식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테헤란로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대표하는 곳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테헤란로는 실제로는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테헤란로는 자본의 침투가 햄버거와 코카콜라에서 건물과 건축 양식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폭넓게 여러 분야에서 협력하며 진행될 수 있는가를 교과서적으로 잘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이다.
이런 해석은 테헤란로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확실해진다. 강남역을 중심으로 한 테헤란로와 강남대로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영어학원과 영어간판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곳에 오면 미국만이 우리의 구세주이며 유일한 희망이라는 절규가 애절하게 울려 퍼진다. 미국의 패스트푸드점이 몰려 있는 것은 이제 너무 진부한 풍경이다. 여기에 더해 크고 작은 한국 가게들도 처음 들어본 요상 야릇한 영어간판으로 중무장 하고 있다. 가게 업종을 보면 더 한심하다. 테헤란로의 화려한 고층건물 뒷골목을 메운 가게들 업종을 세어보자. 갈비집, 호프집, PC방, 노래방, 단란주점, 성인 PC방, 룸살롱, 성인휴게실, 성인마사지, 모텔, 실내경마장 등이다. 공간구조도 어디 한 곳 숨 쉴 곳 없는 과밀의 전형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테헤란 공화국 시민들의 일과를 추측해보자. 외국자본이 주인이고 외국 설계사무소가 디자인한 세계화된 건물에서 일하다 미국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 먹고 퇴근 후에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매춘업소에서 ‘보람찬 하루’를 끝내게 된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 축적되고 있는 부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외국 자본에 종속되어 휘둘리고 외국 자본이 침투하는 경로를 정석으로 안내해주며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을 술과 룸살롱에서 푸는 형편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 후기 자본주의의 현황이다.
좀 더 원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런 문제들은 모두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주인이 되지 못한 데서 온다. 경제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후기 자본주의는 우리 스스로 부를 쌓아서 만들어진 측면이 약하다. 성기(盛期) 자본주의는 차관과 미국-일본의 영향 아래 일구었으며 후기 자본주의는 그 뒤를 이어 밀고 들어온 투기자본에 의해 조작되었다. 국내의 큰 자본들은 개인이건 집단이건을 막론하고 투기, 뇌물, 뒷돈, 리베이트, 강탈, 부정축재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제대로 된 건강한 우리 것이 없다는 말이다. 테헤란로가 화려해질수록 반성하고 극복해야 할 시대적 숙제는 그만큼 커지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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