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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파문

입력
2005.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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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하나의 간섭에도 세상은 몸을 떤다. 물이 그렇고 빛과 공기가 그렇고, 모든 산 것들의 운명이 그렇다. 파문(波紋)이다. 그 파문은 흔적처럼 여리지만 그래서 절절한 존재 증명의 형식이고, 소리없이 진행되는 대타와의 섞임 곧 소통의 언어다.

1973년 등단한 김명인 시인이 8번째 시집 제목을 ‘파문’이라 달았다. 삶의 허무를 오직 상처로 견뎌 온 시인에게 파문은, 그리고 파문의 시간은, 그 허무와 상처의 결을 감지케 하는 세상과 우주의 시간이고 신호일 터이다.

시인에게 허무는 더 이상 애써 극복해야 할 대상도 끝내 무릎 꿇을 운명도 아닌, 이제 다만 물끄러미 들여다봐야 할 삶의 풍경이 된 듯하다. 그는 건져 올린 통발 속에 “텅 빈 파도소리 뿐”이어도 이어가야 할 ‘어로(漁撈)’(‘바다광산’)가 삶이고, “일궈낼 파도 고랑이 있는 한/ 포기하는 농사란 없”(‘가두리’)음을 안다.

그 풍경 앞에 환희와 비탄은 열없는 일이어서, 시인의 사유는 그 극단의 중간에 서서 허무와 상처로서의 삶의 의미들을 더듬는다. 그는 져버린 꽃잎을 두고 “각혈 선명한 저 절정들!”이라 한다. “절정을 모르는 꽃 시듦도 없”겠으나, “우리 불행은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나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에 시인은 시듦 자체가 아니라, 절정 없는 시듦이 안쓰럽다. “꽃대 세우지 못하는 詩業이 탕진해보내는/ 눅눅한 내 무정란의 시간들”(‘꽃을 위한 노트’)

벼랑 위 돌무더기 사이로 꽃 뱀 한 마리가 환영처럼 스치듯 사라진다. 뱀이 숨어 든 틈새.“바닥 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말의 블랙홀이 있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 그렇다면 ‘나’의 시간은?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뜩해서/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끝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두려운 시간만이/ 허물처럼 뿌옇게 비껴 있다”(‘꽃뱀’)

가두리 양식장의 적조로 죽어나가는 치어들을 두고 “제 집을 주검으로 채우리라 흰 배로/ 피어올라 하늘을 떼밀 기막힌 꽃잎들!/ 가둔 바다 큰 꽃봉오리로 헤쳐가려고/ 속절없이 독배를 들이키는 슬하의 저 어린 것들!”(‘가두리’)이라 할 때의 시인의 슬픔도 꽃뱀이 사라진 아뜩한 구멍 공간이나 ‘무정란의 시간’의 그 허무ㆍ상처의 슬픔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파문으로 전하는, 이 어둡고 적막한 풍경들을 두고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따뜻한 적막’)고 다짐하는 시인이 있어 우리는 덜 외롭다. 그의 허무는 모든 허무한 것들을 위로하기 위해 앞질러 느끼는, 이를테면 따뜻한 허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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