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은 굳이 청풍호(淸風湖)라고 불렀다. 충주호라는 정식 명칭이 있는데도 청풍호를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쪽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고 답한다. 댐 건설로 진짜 청풍이 수몰된 지 25년. 그 동안 제대로 부르지 못 한 만큼, 이제라도 제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소 억지 같기도 하지만 곱씹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충주호는 남한강의 또 다른 이름 중 하나이다. 강원 태백의 대덕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지역마다 저마다의 이름을 지녔다.
태백에서 창죽천이다가도 정선에서는 골지천이다. 영월에서는 동강으로 불리고, 충청도로 넘어 오면 충주호가 된다. 경기 여주에서는 여강으로 갈음한다. 이쯤 되면 청풍호를 고집하는 주민들을 나무랄 이유가 없어진다.
충주댐 건설로 생겨난 호수의 길이는 97.2km. 충북 단양, 제천, 충주 등 3개 지역의 마을이 수몰됐고, 이중 제천 지역이 42km로 절반에 가깝다. 청풍은 29개 마을(리)중 27개가 물에 잠겼다. 청풍호가 아름다운 것은 말마따나 청풍명월이 고스란히 물속에 담겨 있어서 일 터이다.
중앙고속도로 남제천IC에서 나오면서 청풍호 여행은 시작된다. 82번 지방도를 타고 청풍으로 접어들기 전, 희한한 모습의 거대한 돌덩이를 만난다. 금월봉이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듯 보이지만 100% 자연산이라는 것이 놀랍다. 땅 위에 울퉁불퉁 솟은 모습이 영락없는 금강산 만물상의 축소판이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도 아닐 터인데, 여태껏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10여년 전 한 시멘트 회사가 시멘트 원료 재취를 위해 땅을 파던 중 발견했다고 한다. 세상에 영원히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 뒤바뀐 셈이다. 억겁의 세월을 하늘을 보며 살았던 청풍이 하루 아침에 수몰된 것과는 판이한 운명이 얄궂기까지 하다.(2면에 계속)
사라진 곳의 희생 덕이었을까. 남은 땅은 축복의 땅으로 변했다. 금월봉을 지나 남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교리 국민관광지는 청풍호의 전경을 시원하게 볼 수 있어 관광객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 때 국내 최대 높이(62m)를 자랑했던 번지 점프대와 인공 암벽장이 있어 극한의 쾌감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도전이 끊이지 않는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짜릿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경 분수에서 내뿜는 물줄기는 순식간에 150m상공으로 치솟은 뒤 물보라를 토해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하늘로 솟는 물줄기와 물속으로 내달리는 인간의 대비된 모습, 청풍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이다.
청풍교를 지나 청풍 문화재 단지에 들었다. 댐 건설로 사라질 운명의 문화재들을 강 상류에 옮겨 놓았다. 팔영루, 한벽루, 금남루, 응청각, 청풍향교 등 문화재 50여점과 생활 유물 2,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조그만 마을의 문화 유산답게 검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아부심벨 신전 사건의 한국판이라 할만 하다.
1971년 이집트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아부심벨 신전을 유네스코의 기금으로 수몰 지역 상류에 옮겨 놓은 사건을 연상케 한다.
향교에서 바라다 보는 청풍호반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빼어난 풍치를 자랑하고 있을 분이다. 단지를 관람한 뒤 반대편으로 내려가다 보면 민속촌을 연상시키는 마을을 만난다. 드라마 ‘대망’의 촬영 세트장이다.
청풍교를 다시 건너 우회전, 옥순대교로 향한다. 10㎞이상 도로를 달려가노라면 강줄기는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금수산 자락을 낀 언덕변에 언뜻언뜻 보이는 바위는 차라리 병풍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내륙 지방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이 곳을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옥순대교에서 보는 옥순봉은 단양 지역이다. 그러고 보니 제천의 바위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옥순봉, 도담삼봉, 사인암 등 단양8경을 이루는 바위들이 호반을 따라 제천까지 이어진 것이다.
어느덧 해질녘이다. 이 무렵 나그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일몰 감상 최적지다. 청풍교앞을 택했다. 청풍나루 뒤로 해가 떨어진다. 무더위에 피어난 물안개가 호수를 뒤덮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인가?
그게 아니었다. 예기치 못 한 장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마지막 불꽃을 태워야 할 해가 안개막에 갇혀 사위로 흩어져 퍼진 셈이라, 덕분에 하늘도 호수도 모두 붉게 달아올랐다.
나그네의 감동도 한껏 흥취가 도도하다.
청풍호(제천)=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청풍호 주변 이름난 계곡 2곳
호수와 바위의 나라만은 아니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덜 미친 물 맑은 계곡은 청풍 여행의 맛깔스러움을 더 하는 감미료이다.
계곡물이 흘러 청풍호로 유입되니 따지고 보면 한 몸인 셈.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유서 깊은 절집을 만나는 행운도 있다. 잘 정돈된 도시풍의 청풍호에 비해 순박한 자연미가 흐르는 계곡 두 곳을 소개한다.
☆ 능강계곡
청풍문화재단지에서 청풍교를 지난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5분 가량 달리면 된다. ES리조트 입구에서 300m가량 더 가면 계곡 입구이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금수산의 주등산로이다.
입구에서부터 장쾌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금수산 7부 능선에 달하면 산사태로 무너진 듯한 300평 남짓한 돌무더기가 나온다. 더우면 더울수록 얼음이 잘 언다는 얼음골이다.
삼복 더위에 돌더미를 파내면 밤톨 크기의 얼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얼음을 먹으면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관광객이 늘고 있다. 입구의 관리인은 “돌을 들춰내지 않아도 여름을 잊을 만큼 시원하니 제발 무분별한 채취를 자제해 달라”고 당부한다. 얼음골까지 왕복 4시간.
얼음골 등산로 입구 왼편으로 난 소로는 정방사로 가는 길이다. 잘 생긴 암벽 앞에 들어선 작은 절집이지만, 역사가 만만치 않다. 신라 문무왕 2년(662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수 차례 중건을 거쳤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 흐른다. 150년 된 암수 소나무 두 그루가 발 아래 청풍호를 굽어보고 있다. 절 뒤편 바위틈으로 흐르는 약수맛도 일품이다.
☆ 무암계곡
청풍교를 중심으로 능강계곡의 반대편에 있다. 음식점과 숙박 시설이 들어선 무암저수지를 지나 산으로 오르다 보면 나무로 지어진 성터가 나타난다. 외딴 지역에 이런 곳이 있나 싶어 놀랐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대망’의 세트장이다. 계곡으로 오르는 길 곳곳에 잘 생긴 바위들과 만난다.
남근석, 장군바위, 안개바위, 애기바위 등 저마다 전설과 사연을 담고 있을 듯한 바위들이 도열한다. 계곡 너머 산정상 부근의 바위는 늙은 스님을 닮았다고 해서 노장암(老丈岩)이다. 안개가 피어 오를 때면 이 바위를 볼 수 없다고 해서 무암(霧岩)이라고도 불린다. 계곡의 이름도 여기서 따왔다.
계곡 정상의 무암사 역시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절 아래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경쾌하다.
신발을 던지고, 맨발을 물에 담그니 더위가 저 멀리 달아난다.
제천=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여행수첩/ 제천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영동고속도로 만종 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 타고 남제천IC에서 나온 뒤, 82번 지방도를 따라 제천 방향으로 오면 청풍호와 만난다.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 감곡IC에서 나와 38번국도를 따라 박달재를 지나 제천까지 간 뒤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 남제천IC로 빠져 나와도 된다.
가는 길이 복잡하지만 주말에 영동고속도로의 체증이 심할 때 시도하면 여행 시간을 다소 줄일 수 있다.
▲ 먹을 것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중간에 위치한 제천은 타 지역에 비해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갖고 있다. 사치스럽지 않고 담백한 건강 음식들이 많다. 송강매운탕(043-651-8115)은 한국과 중국에서만 서식한다는 쏘가리를 재료로 한 매운탕이 유명하다. 담백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진성가든(652-9400)은 엄나무, 칡 등 12가지 한방 재료를 사용, 닭 특유의 비린내를 없앤 칡닭이 이름나있다.
제천 지역에서 나는 황기, 당귀, 천궁 등 10여 가지 약초에서 추출한 액과 배우, 양배추, 양파 등 신선한 야채가 어우러진 약초 순대도 이 지역의 대표적 향토음식. 개미식당(643-5093)이 잘한다. 체력을 증강시키는 생약 황기에서 추출한 액으로 반죽한 황기 국수는 황기마당촌(642-6162)이 유명하다.
▲ 잘 곳
청풍호에는 의외로 잘 꾸며진 숙소가 많다. 이 중 대표적인 곳이 ES리조트(사진)이다. 남제천IC에서 82번 지방도를 이용, 청풍호반으로 따라 가다 보면 청풍대교를 만난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좌회전, 호반도로를 따라 옥순봉 방향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언덕변에 스위스풍의 별장촌이 나타난다. 뒤로 금수산, 옆으로 능강계곡이 흐르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ES리조트의 첫 인상은 외국의 유명 리조트 체인 클럽메드를 연상시킨다. 철저한 회원제여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다는 것이 우선 비슷하다. 대다수 재료를 목재를 이용한데다 모든 건물이 2층을 넘지 않아, 환경친화적이다. 리조트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정적이다.
넓은 정원에 뛰노는 토끼, 사슴, 오리 등을 구경하다가, 이따금 나무 그늘 사이로 산책을 즐기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조금 따분하다 싶으면 선텐 베드에서 수영과 일광욕으로 마무리한다. www.esresort.co.kr (02)508-2323.
국민연금 청풍리조트(643-4111)는 보다 동적인 활동을 원하는 관광객에게 좋다. 드림레이크 관광펜션(648-6380), 학현아름마을펜션(647-3399) 등 펜션도 많다. 청풍면사무소(640-4124)나 수산면사무소(640-4141)에 연락하면 민박 시설을 소개 받을 수 있다.
한창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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