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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20) 金永郞의 '영랑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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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20) 金永郞의 '영랑시집'

입력
2005.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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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1903~1950)의 첫 시집 ‘영랑시집’(1935)은 시문학파 동료인 정지용의 첫 시집 ‘정지용시집’과 같은 해에 나왔다. 두 시인 모두 언어의 조각가라 이를 만했으나, 지용이 이미지를 조직하는 데 더 능란했던 데 비해 영랑은 리듬을 짜내는 데 더 수활했다.

언어의 거죽 곧 소리의 미적 울림에 예민했다는 점에서 영랑은 한 살 위의 소월을 닮아 있었다. 영랑은 소월 시의 도드라진 정형성에서 부러 비껴나 의미와 리듬 사이의 긴장을 꾀했고, 그 점에서 ‘영랑시집’을 진화한 ‘진달래꽃’(1925)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화가 늘 값진 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몇몇 작품들에서 영랑이 소월의 언어를 심상하게 보이게 할 정도로 한국어의 속살 깊숙이 다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시집 ‘진달래꽃’ 옆에 놓인 ‘영랑시집’은 어쩐지 빈약해 보인다. 두 시집 사이의 10년 세월도 영랑이 소월을 따라잡기엔 너무 짧았던 듯하다.

‘영랑시집’의 상대적 위축은 같은 해에 나온 ‘정지용시집’에 견주어서도 거론될 수 있다. 지용이 언어의 음악성에 영랑보다 무뎠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집 전체의 격에서 ‘영랑시집’이 ‘정지용시집’에 앞서는지는 확실치 않다.

지용이 6.25동란 때 납북된 이후 ‘정지용시집’이나 ‘백록담’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남쪽에서 금서였지만, 그래서 그 시절 영랑은 공식 독서계에서 지용을 압도했지만, 납월북 작가들에 대한 금제가 풀린 오늘날 시 독자들은 지용을 영랑보다 높다란 자리에 두고 있다.

그것은 이미 1930년대에 이 두 시인에게 내려진 평가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일 수도 있고, 오랜 세월 동안의 금제가 지용에게 덤의 상징자본을 베푼 탓일 수도 있다. 아무렇거나 그것이 크게 부당한 평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영랑시집’의 문학사적 중요성을, 한국어에 대한 이 시집의 기여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시가 다른 무엇에 앞서 음악이라는 것을, 이른바 자유시가 됐든 현대시가 됐든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영랑만큼 인상적으로 보여준 시인은 찾기 힘들다.

영랑은 ‘설운 소리’라는 시의 첫 행에서 “빈 포케트에 손 지르고 폴 베를레--느 찾는 날”이라며 이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에 대한 선망을 드러낸 바 있지만, 시의 언어를 음악으로 만드는 솜씨에서 그는 그의 우상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영랑시집’에 묶인 작품 대부분이 그 첫 행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것도 영랑 시의 어기찬 음악성과 관련 있을 것이다. 소리가 의미를 압도하는 텍스트에서 그 내용적 고갱이를 골라내는 것은 덧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음악성과도 맞닿아 있는 특질로서, 고유어에 대한 영랑의 집착을 눈여겨볼 만하다. 영랑의 시에서는 한자어가 거의 노출되지 않는 반면에, 도른도른, 살포시, 보드레한, 즈르르, 애끈한, 조매로운, 아롱지는, 그리메, 서느라워, 가부엽게, 흐렁흐렁, 호동글, 홋근한, 서어한, 호젓한, 파름한, 섯드른, 바람슷긴, 하잔한, 포실거리며 따위의 고유어들이 강렬한 정감을 환기시키며 소리의 향연을 베푼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서남 방언이지만, 문맥으로 그 의미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이다.

대체로 정서의 순정함과 관련 있는 그런 고유어들로 치장되며, 영랑의 시들은 고스란히 노래가 된다. 잘 알려진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또는 ‘내 마음을 아실 이’ 같은 작품들 앞에서, 독자는 이 활자 무더기들을 단지 눈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내어 읊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영랑시집’을 연시집(戀詩集)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거기 묶인 작품들은 그 상당수가 사랑의 감정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그것이 관능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영랑시집’의 분위기는 지난주에 살핀 채호기의 ‘수련’(2002)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을 두 세대의 세월 동안 한국인이 겪은 풍속이나 심성의 변화 탓으로만 돌리기는 힘들다.

소월조차도, 비록 아주 드물게나마, 관능의 희열에 눈길을 건넸다는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을 선망했던 영랑이 제 시 속에 오직 순정한 마음만을 담은 것은 신기한 일이다.

제 마음의 바람직한 상태를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 비유한 ?시인에게, 시는 육체의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영랑의 시 가운데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것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일 터인데, 이 시의 열쇠어들이라 할 기다림(영랑의 서남 방언으로는 ‘기둘림’), 설움, 찬란한 슬픔 같은 것은 그대로 ‘영랑시집’의, 더 나아가서는 영랑 시 일반의 공간을 요약하고 있다. 영랑 시의 화자들은 흔히 뭔가를 기둘린다.

그러나 그 기둘림의 대상이 마침내 온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해지는 법은 없다. 우선, 그 기둘림이 별다른 반대급부와 연계되지 않아 간절한 느낌을 자아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리는 ‘달’의 화자에게 달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가냘픈 그림자를 벗으로 선사하는 것 정도다. 내일모레 올 추석을 기둘리는 ‘오--매 단풍 들것네’의 화자에게도 그 기둘림은 조바심과 거리가 있다.

둘째, 기둘림은 간절하지만 그 대상과의 만남이 외려 슬픔을 낳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영랑 시학의, 그의 세계관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봄을 기둘리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화자에게, 그 봄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왜냐하면 그 봄은 오자마자 곧바로 “여읜 설움”을 강요하고 떠나가 버릴 덧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영랑시집’에는 묶이지 않은 ‘오월한(五月恨)이라는 작품에서도, 화자는 “모란이 피는 오월달”을 “청산을 거닐면 하루 한치씩/ 뻗어오르는 풀숲 사이를/ 보람만 달리던 오월”로 기분 좋게 기억하지만, 그 오월은 또 “어느새 다 해--진 오월”, 그래서 한을 남기는 오월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기둘림은 생의 일상적 형식일 뿐, 기둘림의 매듭이 삶을 전환시키지는 못한다. 미래에 있던, 그들의 기둘림 대상은 찰나의 현재에 그들을 스치고 과거로 멀어짐으로써 다시 기둘림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흡사 그 바다에서 이 바다로 고요히 떨어지는 별살같이/ 옆산 모롱이에 언뜻 나타나 앞골 시내로 사뿐 사라지”(‘불지암(佛地庵)’)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말이 나온 김에, 영랑의 탐미적 상상력이 떨어지는 천체와 자주 관련된다는 것을 지적해두자. ‘제야(除夜)’의 “제운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버린다/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라거나, ‘황홀한 달빛’의 “저 은(銀)장 우에/ 떨어진단들/ 달이야 설마/ 깨어질라고” 같은 시행들이 그 예다.)

그 덧없는 기둘림이 설움을 낳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설움은 대상과 주체를 통일한다. “그 색시 서럽다 그 얼굴 그 동자가/ 가을 하늘가에 도는 바람슷긴 구름조각/ 핼슥하고 서느라워 어데로 떠갔으랴/ 그 색시 서럽다 옛날의 옛날의”(‘그 색시 서럽다’ 전문) 같은 시행에서, 바람에 스쳐 조각난 구름에 비유된 옛날의 색시와 화자를 묶는 것은 설움이다.

시적 허용이나 소설 화자의 전지적 관점을 배제한 일상어의 경우, 한국어 단어 ‘서럽다’는 평서문에서 오직 1인칭만을 주어로 삼을 수 있는 이른바 심리형용사 또는 주관형용사다. 그러나 시인은 “그 색시”를 “서럽다”의 주어 자리에 놓음으로써, 자신의 설움을 그 색시의 설움과 포개고 있다.

‘그 색시 서럽다’에서도 엿보이듯, 영랑 시의 소리 지향이 이미지의 직조를 아예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다. “온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이/ 꼭 감긴 눈 속에 뭉치어 있네/ 날랜 소리 한마디 날랜 칼 하나/ 그 핏줄 딱 끊어버릴 수 없나”(‘온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 전문) 같은 시행들에서도, 이미지는 소리 못지않게 견고하다.

영랑의 시들에서 이미지가 실제 이상으로 자주 흐릿해 보이는 것은 음악성이 워낙 승해서이거나, 이미지를 짜내는 데 힘을 쏟은 또래 시인 지용과의 대비 때문일 것이다.

“달빛으로 눈물을 말릴까보다”(‘노래’)나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내 마음을 아실 이’) 같은 시행들은 사춘기를 넘겨버린 성인 독자들에게 간지럽게 읽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랑은 한국어가 바로 그런 간지러운 정서까지도 섬세하게 붙잡아낼 수 있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해넘이로 붉어진 하늘을 두고 “뉘 눈결에 쏘이었소/ 온통 수줍어진 저 하늘빛”(‘뉘 눈결에 쏘이었소’)이라고 말할 줄 아는 시인이 영랑 이전에는 우리에?없었다.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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