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아시아 평화와 미래를 위한 항해’는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인과 일본인 600여명이 한 배에 타고 2주간을 항해하는 행사에 내가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다. 가능하면 한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책임질 젊은이들이 항해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행사가 유명인사나 원로 중심이 아니라 차세대를 짊어질 젊은 주역들이 교류하는 자리였으면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또 일본인을 만나는 것은 생김새와 피부색이 같아서 좀 편안하기도 하고, 또 일본인이라서 불편하기도 하다. 나는 1988년 처음으로 도쿄(東京)대에서 열린 한 세미나를 통해 처음으로 일본인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는 논문이었는데 이를 일본 도쿄대에서 발표하려고 하니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왜 이렇게 조심스러울까.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만나지 못할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식민지지배자 일본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당시에 알지 못했고, 마음의 정리도 되지 않았다. 일본은 단지 일본국가, 일본국민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보통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내게는 식민지배자 일본만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단일한 인식을 벗어나는 데 오래 걸렸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인 친구들을 만난다. 편안해진 마음가짐으로 한일교류에서 3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밝히는 일과 막연한 피해의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피해를 밝히는 작업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해왔다. 그러면서 피해의식은 과잉이었다. 더욱이 피해의식은 정치권력에 의해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식민지배와 그 유산으로 남겨진 억압적인 정치ㆍ사회제도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고 극복하지 못했다.
둘째, (일본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가해의 역사란 없다”고 하는 파렴치는 논외로 치고, 자신의 선대가 저지른 가해를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역사의식을 가진 일본 시민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이 여성을 보는 관음적 시선을 담고 있다. 가해자인 남성의 시선이다. 왜냐하면 여성를 인간으로 바라다 보지 못하고 성적 대상으로만 비 인간화시키기 때문에. 가해자 역시 비 인간화하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가해자의 시선인 관음적 시선을 버릴 것인가가 새로운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셋째, (지구적 수준에서 얘기를 하자면) 지난 번 미국선거에서 조지 W부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이를 가장 반긴 것은 일본 언론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도는 미일이 앞으로 4년긴 밀월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일본은 싫다. 동북아시아와 아시아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시각에서 볼 때 일본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경제는 큰데 정신은 작은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 나라는 큰데 정신은 혼란스럽다고, 한국은 양국 사이에서 살아 남으려 한다. 이래서는 보편의 정신이 태동하기 어렵다. 서구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보편에 기여하는 아시아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를 한ㆍ중ㆍ일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번 항해가 아시아의 보편에 기여하는 기회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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