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스폰지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로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영하가 “다른 장르에 대한 개방성과 흡인력이 영화가 지닌 힘”이라고 말했듯 영화는 타 장르 속 이야기를 왕성하게 흡입하며 힘을 키워간다.
타 문화 장르가 영화라는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부정이 개입된 결혼’(아이헨바움) ‘양가로부터 혈통을 의심 받고 멸시당하는 아이’(슈나이더) 등 타 장르의 영화화에 대해 비평가들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던 과거와는 완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요즘 한국영화계는 주로 소설과 인터넷 만화에서 이야기거리를 사냥하고 있다.
사냥에 걸려든 소설과 만화
현재 만화, 소설 등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화 작업 중인 작품은 10편이 넘는다.
이재용 감독이 인터넷만화 ‘다세포소녀’를, ‘폰’ ‘분신사바’ 등으로 한국적 호러 장르를 개척한 안병기 감독은 강풀의 인터넷만화 ‘아파트’를 영화화한다. 만화가 허영만의 ‘타짜’와 ‘식객’도 나란히 영화로 만들어진다.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타짜’를, ‘식객’은 현재 영화사 쇼이스트에서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소설쪽에서는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송해성 감독에 의해,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은 임상수 감독,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는 주경중 감독에 의해 작업 중이다. 그 밖에도 판권이 팔린 소설과 만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좋은 원작이 좋은 영화를 보장할까
탄탄한 구성력을 지닌 허영만의 만화는 영화계가 늘 선호하는 대상이다. 이미 ‘비트’를 비롯해 여러 작품이 영상화됐다. 하지만 원작이 훌륭하다 해서 영화화가 쉬운 것은 아니다.
‘식객’을 제작하는 쇼이스트의 이정석 마케팅부장은 “만화가 워낙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데다 이야기 구조도 훌륭해 날로 먹는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시나리오 초고가 나온 지금 원작과 다른 영화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기가 힘든 것 같다”고 말한다. 만화의 분절적 특성 때문에 ‘기승전결’이 명확한 서사구조를 재창작하기도 어렵다.
인기 만화의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한 영화감독은 “원작을 놓고 보니 캐릭터는 살아 있지만 서사성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더라”고 털어놓는다.
소설의 경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태백산맥’의 장대함을 거장 임권택 감독조차도 충분히 표현해 내지 못했듯 무엇보다 2시간 안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어렵다.
LJ필름의 곽신애 이사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소설 속 서사를 한정된 시공간 안으로 끌어와 압축해서 들려줘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점”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사랑하는 이야기들
영화 관계자들이 영화화를 위해 선택하는 것은 소설의 경우 에피소드가 풍부한 작품이다. 김영하의 소설이 환영 받는 이유도 그가 일상성을 벗어난 구체적인 이야기를 영화적 설정을 차용해 풀어 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화의 경우는 독특한 소재, 또는 서스펜스가 가미된 작품이 선호된다.
인터넷 만화에 눈을 돌린 것은 최근의 일인데 만화책과 달리 인터넷 만화는 마우스의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며 봐야 하는 특성상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이 가미되곤 한다. 최근 스릴러의 강세와 함께 인터넷 만화는 더욱 영화 관계자들의 눈길을 끈다.
문화평론가 강명석씨는 “독특한 이야기만 찾다 보면 영화가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계 관계자들은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사가 필요한 장르고 영화 작업의 대부분은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작업이니 타 장르의 소재를 흡수하는 건 이상할 게 없다”고 입을 모은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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