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싸움은 구경하기 어렵다. 구경꾼을 의식한 선동만 난무할 뿐 싸움의 대상을 진지하게 여기는 싸움은 매우 희귀하다. 사실 이런 싸움은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동네 싸움에선 싸움을 하는 상대편 들으라기보다는 구경꾼들 들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구경꾼들에게 드라마틱하게 호소하기 위해 과장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 소리를 들은 상대편은 화가 나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싸움은 악화된다.
과거 전통적인 공동체 마을에선 호소용 싸움 방식의 효용이 있었다. 마을의 원로들이 나서서 사실 관계 규명을 포함해 공정한 심판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 문화는 사라졌는데도 그런 싸움 방식은 전통으로 이어져 여전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들을 대상으로 호소ㆍ선동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고려되지 않는다.
사회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싸움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 다 그런 동네싸움을 닮았다. 좋게 말하자면 여론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는 구경꾼의 수준이다. 구경꾼의 수준이 낮으면 그 싸움은 개판이 될 수밖에 없다. 구경꾼이 저질이라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 자기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이라 싸움의 내용에 대한 이해나 관심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구경꾼 삼아 하는 싸움에 눈꼽만큼의 ‘생산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치판의 싸움이 대표적인 예다. 늘 상대편의 최악의 발언이나 행태에 과장ㆍ왜곡의 포장을 씌우는 고자질 싸움이다. 자해(自害)의 극을 치닫는 것 같지만 중요한 효용이 하나 있다. 그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저주 심리를 극대화시켜 고품질 정치 지망생들의 수를 줄임으로써 기존 정치인들의 기득권 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 과자가 귀하던 시절 어린애들이 과자에 침을 ‘퉤퉤’ 뱉어 놓음으로써 자기 소유임을 분명해 해 놓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지성의 최고 보루라 할 서울대를 둘러싼 싸움은 어떤가? 싸움에 임하는 서울대 총장ㆍ교수들의 자세는 경외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워낙 학문 연구에 바빠 잡글 읽을 시간이 없는 탓인지 이들은 서울대에 대한 모든 문제 제기를 ‘서울대 폐지론’으로 몰아간다.
그건 아주 쉬운 싸움이 된다. 서울대에 대해 비판적인 나 같은 사람도 ‘서울대 폐지’엔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경꾼들만을 대상으로 삼은 그런 몰상식한 과장ㆍ왜곡이 서울대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건 ‘서울대 폐지론’의 정당성만 키워줄 뿐이다.
나는 노무현 정권 사람들의 서울대에 대한 최근의 거칠고 기회주의적인 비판에 동의하지 않지만, 서울대 사람들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대안을 내놓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겸손’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선 두려움마저 느낀다. 이게 바로 한국 엘리트의 정체로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서울대 입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나라 망칠 평등주의에 환장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그들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는 선에서 대안 모색을 해 보거나 적어도 사회적 화두로 삼아 공론화를 시도할 책임이 서울대에 없단 말인가?
어느 신문을 보다 “재벌 총수가 미워 투기자본에게 재벌의 운명을 맡겨도 좋다는 발상” 운운하는 대목을 접하고선 언제까지 이런 식의 저질 싸움을 해야 하는가 하고 기가 질렸다. 나는 재벌의 소유 지배 구조 문제는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없는 딜레마로 보며 재벌의 주장에도 경청할 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재벌 총수에 대한 미움으로 몰고 가는 것엔 동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싸움을 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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