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지나간 여름 아침은 싱그럽고 상쾌하다. 하지만 범죄나 폭력의 피해자에게 싱그러움과 상쾌함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 마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범죄와 폭력 발생 자체를 줄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범죄와 폭력은 늘 있어 왔지만 21세기 한국은 어느 때보다 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통계상의 수치도 증가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양상과 질이다. 1970년대에 1건, 80년대에 2건, 90년대에 5건 발생했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잔인한 연쇄 살인 사건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직 반도 다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확인된 것만 5건에 이른다.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납치살해 사건도 여러 건 미해결 상태다.
최근에는 엽기적인 아동 학대, 가정 폭력, 집단 성폭행, 국제적 인신매매 사건이 빈발하는 가운데 새로운 수법의 첨단 범죄도 증가 추세에 있다.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과 폭력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도 군대 내 폭력 문제로 오염되고 있다.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과 신부들이 갖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범아시아권에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엄벌식 처방으론 한계
사회학자 뒤르껭은 사회를 인간 유기체와 같다고 보고 사회가 급격한 변화나 집단 간 갈등으로 인해 긴장이나 피로현상이 발생하면 마치 감기에 걸리듯 범죄 빈발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감기에 특효약은 휴식과 섭생이며 예방책은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이다. 이 같은 기본수칙을 어기고 항생제를 남용하다가는 간과 소화 기능을 망치는 것은 물론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슈퍼 바이러스를 만들어 사람을 죽인다. 감기를 우습게 알다가 폐렴 등 중병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범죄 문제에 엄벌과 극형이라는 항생제 처방으로만 일관했으며 일상적인 폭력 문제는 거의 무시해 왔다. 법 규범의 해석과 적용에는 전문가지만 범죄심리와 행동, 사회적 상호관계 등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법률가들이 범죄 정책을 독점해 왔다. 교육 정책은 오직 지식 습득과 진학 등 경쟁과 성취에만 집중되었다.
부모들은 직장 상사와 고객들과 식사하고 술자리 갖는 것을 자녀 양육보다 중요하게 여기도록 강요받고 있다. 이웃 간에는 관심과 협력보다 의심과 경계, 무관심이 불문율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서구 사회가 범죄와 폭력 문제의 해결책으로 찾아낸 것이 우리에게는 전통이요 고유문화인 ‘공동체(community)’의 건설이라는 점이다.
마을 단위마다 ‘이웃 사촌’ 분위기를 형성하고 경찰과 학교, 지방정부 등 공공기관도 ‘이웃’의 일원이 되어 함께 스스로를 운영하는 공동체,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하다 못해 스스로 낡았다 무시하고 버리고 있는 삶의 모습이다.
-사회 전체 건강성 회복을
세계보건기구(WHO)가 종합적인 범죄와 폭력 문제 해법을 내놓고 각국이 경찰_의료_교육 등 전 기능이 연계ㆍ협력하는 유사한 대책을 수립ㆍ시행하고 있다.
‘살기 좋은 공동체 만들기’ 경주에서 마치 우리가 토끼요 서구 사회가 거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든 부분이다. 이제 세상은 누가 더 많이 생산하느냐로 경쟁하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더 오래 잘 지속할 수 있는 사회를 가꾸느냐, 얼마나 안전하고 살기 좋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흉악범엔 극형과 엄벌, 일상적인 폭력에는 무시로 일관하던 전근대적이고 민간요법적인 범죄 정책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적절하고 효과적인 진단과 처방을 통해 범죄와 폭력이라는 사회적 질병에 대처하는 선진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이 시대 한국인들의 과제이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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