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슈퍼마켓 육류코너에 처음 가면 ‘home grown’ 표지가 눈에 띈다. 쇠고기든 뭐든 ‘Irish home grown’ 또는 ‘Scottish home grown’ 이 가장 값비싼 특등육이다. 우리로 치면 ‘집에서 기른’ 한우나 토종 닭고기에 해당하는 고급 먹거리를 상징한다.
그런 영국 사회가 ‘home grown’ 테러 충격에 휩싸였다. 영국 초유의 자살폭탄테러 용의자들이 모두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파키스탄 및 자메이카 계로 드러난 때문이다. 4명중 3명이 20세 안팎에 대학생 교사 등 평범한 삶을 살던 젊은이들이 사회를 향해 잔혹한 자살테러를 감행한 사실이 당혹스러운 것이다.
-외부 아닌 자생적 테러에 충격 커
이에 따라 당초 외부에서 침투한 알카에다 소행으로 단정하고 이라크 참전 책임 등을 논란하던 영국 사회는 자살 테러범을 키운 사회적 토양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다.
정부와 국제언론이 사건직후 누군가 인터넷에서 ‘유럽 알카에다’ 이름으로 범행을 주장한 것에 집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건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따라 명분과 이해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비판적 언론과 지식인들은 범행의 근본 동기를 소수민족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데서 찾는다. 사회 변방에서 불만을 키우다가 정체성을 찾아 파키스탄 이슬람 학당에서 교리를 배우는 과정에서,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 핍박 받는 이슬람의 고난 등 집단적 명분에 눈 떴으리라는 풀이다.
2001년 영국을 휩쓴 인종 분규에서 표출된 소수민족사회의 깊은 분노가 바탕이고,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영국과 서구가 이슬람을 짓밟은 데 대한 저항의식이 이념적 뇌관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론 이들이 어떻게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정밀한 폭발장치를 마련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따라서 정부와 국제언론이 알카에다 배후를 추적하는 데 몰두하는 것은 언뜻 당연하다. 그러나 알카에다 연계 흔적은 전혀 없다.
테러 용의자들이 살던 리즈 시에 머물다가 사건 직전 출국한 이집트 출신 생화학자가 배후처럼 알려졌으나, 이 인물을 조사한 이집트 정부는 런던 테러나 알카에다와 아무 관련없다고 부인했다. 그 밖에 언론에 나도는 알카에다 관련 의혹도 모두 밑도 끝도 없는 얘기일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범행 배후는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해 국제테러를 조종한 세력의 정체는 대개 미스터리로 남는다. 하수인들이 흔히 배후세력이 노린 것과는 엉뚱한 명분을 믿고 목숨을 던지기도 하는 것이 국제테러의 속성이다. 실제 국제언론이 런던 테러와 닮은 알카에다 소행으로 단정한 지난해 스페인 열차테러도 알카에다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마드리드의 권위지 엘 문도(El Mundo)의 빅토르 델라 세르나는 런던 테러 뒤 쓴 칼럼에서 마드리드 테러범은 현지 조무래기 범죄자들이고, 폭발물도 현지 밀매업자가 공급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또 외부개입 흔적은 모로코 정보기관과 연계된 것뿐이라고 썼다. 국제언론은 기본전제부터 틀린 채 알카에다 위협을 떠드는 셈이다.
-사회적 모순과 서구의 참욕이 원흉
음모와 공작이 난무하는 국제테러의 본질을 살필 계제는 아니다. 다만 테러 후폭풍 논란의 실체나마 잘 헤아려야 한다. 미국 MSNBC는 부시 정부는 런던 테러를 ‘테러와의 전쟁’ 명분을 되살릴 호기로 삼고 있다고 전한다. 이라크 점령 정당화와 대 테러 공조를 둘러싼 유럽과의 갈등해소에 도움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영국의 비판적 지성을 대표하는 신문 가디언 등은 알카에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논평을 내놓고 있다. 알카에다는 기껏해야 실체 없는 이념에 불과하며, 그 이념을 추종하는 테러범은 영국 사회의 모순과 서구의 탐욕이 키웠다는 지적이다. 알카에다는 종적조차 묘연한 빈 라덴이 아니라, 바로 영국과 서구가 키웠다는 통렬한 반성이다.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