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부는 초등학교 5, 6학년 즈음, 여름밤 마당에 피워둔 모깃불 연기냄새를 맡으면서 마당 복판에 놓여있었던 평상에 누어 총총한 밤하늘 별들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자기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적어도 사춘기가 지난 후 성년이 되어서야 시작된다고 어른들은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시작된다고 본다. 비록 그 질문이 막연하고 논리정연하지는 않을지라도 초등학교 교과과정 5, 6학년쯤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교육을 다 받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와 생명체들의 신기함이 예민한 소년 소녀들의 감수성에 의해 포착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육근(六根)의 기능이 타성에 젖거나 마모되지 않고 배터리를 새로 갈아끼운 라디오의 명료한 음성처럼 또렷하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나는 1940년생이고, 해방직후 신생국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명색이 교육관련의 일에 종사하면서 정년퇴임을 맞게 되었으니 60년 동안을 공부라고 하는 일에 관계해온 셈이다. 내 경험의 결론은 공부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초등교육 6년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은 중등교육 과정과 대학의 고등교육과정보다 더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한 인간의 품격형성과 장차 무한하게 확대 심화해갈 각자 전문지식의 기틀이 놓이는 시기가 놀랍게도 초등교육과정인 것을 학부형들이 깨닫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내가 60년 동안 철학 종교학 신학 등의 학문을 섭렵해 온 셈이지만, 소년기에 여름 밤 밤하늘 별똥들의 직선낙하를 보면서 스스로 묻던 그 근본적 존재 질문에서 크게 진전한 것이 없다.
나는 1950년대에 지방 호남의 명문 중ㆍ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선호하는 대학진로는 법대 상대 의대의 3개 분야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는 유명한 법관 의사 그리고 경제계 지도급 인사들이 많다. 친구들은 모두 확신을 가지고 확실한 자기진로를 결정하고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입시과목 시험준비에 전념하는 기간에 나는 가정의 부모형제도 학교의 선생님도 이해해주기 어려운 ‘마음의 병’을 앓으며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 마음의 병 원인은 ‘공부’라는 근본화두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허허막막한 대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무엇이며, 단 한번의 기회밖에 없는 나의 전체 인생을 바쳐서 살아도 후회 없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찾는 일이었다.
본래 유가적 가정환경에서 자란 나는 종교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특히 기독교 성직자가 되는 것은 가족 계보에서 볼 때 생소하던 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여곡절을 거쳐 나의 ‘마음앓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이라고 하는 학교에 장공 김재준 선생님이란 분을 찾아가 뵈라는 광주 백영흠 목사의 안내를 받아 나는 신학이라는 학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직자가 되려는 엄청난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않았다. 요즘말로 하면 삶과 존재의 뿌리를 알고싶은 충동, 곧 누구나 인생과정 사춘기에 한번씩 겪는 ‘마음앓이’를 남달리 좀더 심하게 앓았던 것인데, 그 치유를 위하여 이성을 넘어선 보다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것에 목말라 하여 기독교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신약성경을 읽는 중에 내 마음이 진리의 빛으로 밝게 조명되고 평온해진 경험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문의 분야별 계보로서 말한다면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세 가지 학문 분야 중 신학이나 종교학은 넓게 보면 인문과학 분야에 속한다. 그러나 인문학의 대표적 학문으로서 거명되는 문학 철학 사학과는 달리 초월적인 차원 혹은 ‘궁극적 관심’이 동반되는 공부라는 점에서 신학이나 종교학은 일반적인 인문학과 비교해볼 때 학문방법이나 학문태도에서 사뭇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신학이나 종교학도 인간이 수행하는 학문활동인 이상, 이성을 통과하지 않고서 행해지는 독단이나 반이성적(反理性的) 학문이어서는 아니 되지만,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의 독단에 굴복하여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인간의 초월경험을 미신 또는 환상이라고 속단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도 문제라고 깨닫게 되었다. 충분히 논리적이고 이성적 분별력을 지니지만 ‘주객구조’라는 이성의 인식론적 기본틀을 초극하면서 진리를 경험하는 ‘황홀한 이성(ecstatic reason)’도 엄존한다는 것을 신학이나 종교학은 말해야하는 난제를 갖는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엔 공부의 세계는 넓고 공부하는 방법도 연구대상에 따라 다양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숲을 보지 못하고 한그루 나무에만 집착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나의 붓대롱으로 본 하늘이 ‘하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태도는 공부하는 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겸손의 덕목이라고 생각한?
다시 말해서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일정한 나의 견해를 지니면서도 독단적 편견에서 벗어나고,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이해하고,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을 말하고 체험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또 한가지 내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중요한 점은 보편적 진리란 구체적이고 특수한 형태로 체현(體現)되기 때문에 사물의 다양성과 사상표현의 차이성을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신학이 신앙적 학문이 되는 것은 탓할 수 없고 도리어 당연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앙이라는 명분 아래 독단적 학문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신학공부함에 있어서 ‘인문학의 꽃’이라고 일컫는 해석학(hermeneutics)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문과학은 결국 시공을 달리한 다른 사람들의 내면적 삶의 체험을 ‘오늘 여기’에서 되살려내어 내가 다시 체험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과 양을 더 풍요롭게 해가는 과정인만큼 신학도 해석학이라는 학문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경전의 해석, 종교적 상징의 의미 독해, 성현들이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내 체험과 나의 깨달음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도 해석학적 이해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인간적 삶이란 해석학적 과정으로서의 삶”이라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 기독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등 위대한 종교들은 서로 다른 특정한 문화와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해석학적 모체(母體,matrix) 속에서 체험되고 표현된 공동체의 구원체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교간의 대화협력이 나의 종교적 삶을 더 풍요롭게 심화시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몸을 지닌 하나의 생물체이므로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 분야의 연구결과에 언제나 귀 기울이면서 신학공부를 해왔다. 또한 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사회과학의 제반 연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인간의 관심과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보편타당한 것이 못되고, 언제나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굴절되거나 편파적이 된다는 슬픈 비극적 인간상황에 더욱더 눈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세계와 역사적 삶 속엔 언제나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 경이로운 것이 창발(創發)한다는 사실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감사하게 된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아무 조건 없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민초들의 꺼버릴 수 없는 열정의 밑바닥에서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초월자’의 현존을 보고 느낀다.
진정한 종교란 권위적 종교의례나 경전신조에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성현들의 높고 맑은 생명적 진리체험을 내 안에서도 체험해보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하여 연꽃처럼 오물과 부유물이 가라앉은 연못바닥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황량한 계곡에서 메마른 풀뿌리를 씹어삼켜도 새하얀 젖을 만들어내는 양들처럼 멋있는 삶을 살아가는 비법을 체득케 해주는 것이다. 결국 종교란 무한시공의 총체적 표현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면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신학이나 종교학을 잘하려면 철학적 소양이나 도덕적 진지성을 지녀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학적 상상력과 시인의 감수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요즘은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김경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는…
개신교 성직자(목사)이면서 개신교의 배타성을 비판하고 다른 종교와의 이해와 화해에 앞장서온 진보적 신학자이다. 1996년 광신적 개신교도에 의한 화계사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위로금을 전달하고 화계사와 교류의 자리를 마련해 불교와 개신교간의 화해의 길을 열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화계사가 이 뜻을 기려 성탄절 축하 플래카드를 내 건 것은 그 후 불교와 개신교, 가톨릭 사이에 서로의 축일을 기념해주는 새로운 전통으로 발전했다. 그는 1971년부터 한신대에 재직하며 한신대가 주축이 된 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1940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광주고를 거쳐 한신대와 연세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고려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8월에 정년퇴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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