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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23) 라인홀트 메스너의 비공식적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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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23) 라인홀트 메스너의 비공식적 전기

입력
2005.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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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폴즈 파이브(Ben Folds Five)란 미국의 록 그룹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건 그들이 이미 수 년 전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밴드명에 ‘파이브’가 있어서 5인조로 오해하기 쉬우나 건반과 보컬을 맡은 벤 폴즈와 베이스에 로버트 슬렛지, 드럼에 대런 제시 등 단촐한 3인조 편성이었다. ‘파이브’는 그저 어감이 좋아서 썼다고 한다.

이 밴드에서 독특한 건 록 음악의 중심 악기라 할 수 있는 기타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보통 밴드였다면 기타가 맡았을 멜로디 라인이 벤 폴즈의 드라마틱한 피아노 연주로 채워지는데, 그 사운드가 어느 록 밴드 못지않게 강렬하면서도 여느 록밴드의 사운드에선 들을 수 없는 드라마틱하고 다채로운 곡 전개를 들려준다. 이들의 독특하고도 흥미진진한 연주는 우리나라 록 마니아에게도 독보적인 매력을 발휘했었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건 아니다.

1995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등장한 이들은 1999년 3집 앨범을 발표한 다음 해체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벤 폴즈는 활발한 솔로 활동을 펼치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피아노와 노래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벤 폴즈 파이브의 마지막 앨범 타이틀은 ‘The Unauthorized Biography of Reinhold Messner’이다. 직역하면 ‘라인홀트 메스너의 비공식적 전기’ 정도가 될 텐데 벤 폴즈 파이브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라인홀트 메스너에 관한 것이다. 정확히 말해 오랜만에 벤 폴즈 파이브의 음반을 듣다가 더더욱 오랜만에 라인홀트 메스너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라인홀트 메스너가 히말라야를 오르는 모습을 시각적 배경으로 해서 벤 폴즈 파이브의 노래를 상상하면 이 글의 의도나 느낌을 미리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메스너에 관한 책과 벤 폴즈 파이브의 음반이 있다면 더욱 좋다. 어쨌거나 관건은 또 다른 ‘라인홀트 메스너의 비공식적 전기’를 나름대로 써 보는 일이다.

더 좋은 건 메스너의 족적을 따라 직접 히말라야를 찾는 일이겠지만, 히말라야는 커녕 북한산 등정도 요원한 나로선 음악이나 들으며 그의 내면을 추적해 보는 것도 괜찮은 여름 나기라고 생각한다. 벤 폴즈 파이브의 음악이나 라인홀트 메스너의 삶이나 서늘하고 극적이란 점에선 대동소이하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를 완등한 것으로 유명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0년 꿈에도 그리던 낭가파르바트 원정길에 올랐다. 그때 메스너는 낭가파라바트에서도 가장 위험하다는 루팔벽을 루트로 삼았다.

이 루트는 며칠 전 한국의 루팔벽 원정단이 등정에 성공하기까지 35년 동안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최악의 코스로 악명 높다. 헤를리히 코퍼 박사가 이끄는 독일 원정대의 일원으로 등반에 참여했던 메스너는 그러나 조직적이고도 일사불란한 조직 통제로 일관하는 헤를리히코퍼 박사의 지휘에 반발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등반을 시도했다.

동생 귄터가 그를 따랐고, 둘은 결국 낭가파르바트를 정복했으나 고산병 증세를 보이던 귄터가 하산길에 눈사태를 만나 실족하고 메스너는 사경을 헤매며 홀로 하산을 시도하다가 원주민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때 메스너는 26살이었다. 그 사건으로 메스너는 명예와 함께 동료들의 오해에 따른 비난을 동시에 받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오래도록 사건의 전말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메스너는 자신이 직접 쓴 ‘벌거벗은 산’(김성진 옮김, 이레)을 통해 당시의 사건을 여러 사람의 경험과 회고를 교차시켜 돌이키고 있다.

메스너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14좌 완등 말고도 15차례의 무산소 등정과 7차례의 루트 개척 등이 있다. 메스너는 자연과 직접 호흡하기 위해 산소통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집단 등반이 아닌 한 두 명만이 자일 파트너로 참여해 직접 장비를 짊어지고 등정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개척자로도 유명하다. 메스너의 동생 귄터는 어쩌면 알파인의 완성을 위한 안타까운 번제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생존 장비만을 가지고 거대한 자연에 도전한다는 건 자신의 삶을 죽음에 최대한 밀착시킴으로써 자연의 극한과 삶의 극한을 동시에 체험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자기 필연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 빠지기 쉬운 두 가지 함정이 바로 두려움과 오만이다.

두려움이 나서야 할 발을 뒤로 물리게 한다면 오만은 한 번 쉬고 디뎌야 할 걸음을 단번에 옮기게끔 만든다. 하지만 ‘희박한 공기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더 나아가는 것이나 덜 나아가는 것이나 공히 나락의 지름길이다. 그 사소한 한 걸음의 차이 속에 죽음이 상존한다.

등반가에게 죽음과 싸우는 모험이란 말은 결코 허장성세의 수사가 아닌 눈 앞에 직면한 현실인 것이다. 그들은 매 순간의 죽음을 건너 뛰면서 삶의 다른 국면들을 체험한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히말라야 등정길에 동생을 잃은 메스너의 삶은 이후 동생의 시신이 결빙된 채 수장되어 있는 빙판길을 조심조심 내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메스너는 자신이 매번 내딛는 걸음의 안쪽에 동생이 잠들어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은 그에게 거듭 모험에 나설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원죄이자 극복해야 할 이 세상의 모든 산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맞이하게 될 죽음의 가장 뼈 아픈 원천이었다.

따라서 그건 세계 최고의 등반가가 되겠다는 야망보다는 보다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삶의 근본에 대한 희구로 이어진다. 그가 만년에 쓴 ‘산은 내게 말한다’(강현주 옮김, 예담)가 깨달은 자의 자기 성찰과 삶에 있어서의 올바른 처세에 관한 얘기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한 자기 필연성이 아니고서는 ‘산이 있어 오른다’는 등반가들의 오래된 경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법어 마냥 아리송한 선문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벤 폴즈 파이브의 노래를 들어보자.

‘라인홀트 메스너의 비공식적 전기’에 담긴 노래들은 벤 폴즈 파이브의 이전 노래들에 비하면 보다 웅대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지속된다. 도회적이고 멜랑콜리하고 유머러스한 이전 앨범들이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들을 벤 폴즈의 독보적인 피아노 연주로 내면화한 경쾌한 로큰롤 위주였다면 이 앨범에선 훨씬 제어된 연주에 다양한 음향 효과들을 선보이고 있다.

특유의 신랄한 가사와 쿨한 감성이 이들의 특장이라 여겼던 팬들에겐 실망감을 안겨 줬던 것으로 알지만, 사운드만 놓고 따졌을 때 그리 처진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숙성됐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만큼 말끔한 프로듀싱이 돋보이기도 한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삶에서 음악적 모티프를 얻었을지언정 벤 폴즈 파이브는 그에 대한 공허한 헌사나 일대기를 훑어나가는 식의 뻔한 무리수를 두고 있지는 않다.

단지 라인홀트 메스너가 자신의 삶에서 깨닫고 느꼈음직한 내용들을 공명이 질긴 가사에 담아 감각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소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첫 곡 ‘Narcolepsy(기면발작)’를 들으면서 메스너와 그의 동생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난 너에게 경고했어야 했어/ 난 잠들 거라고/ 내 말이 뭘 의미하는 지 넌 몰랐을 거야/ 난 정신을 잃거나 행복해질 거야/ 난 잠들 거야/ 잠들었을 때 아무 것도 고통스럽지 않아/ 난 지친 게 아니야/ 난 지친 게 아니야(반복)/ 단지 잠들었을 뿐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벤 폴즈의 애절한 목소리로 반복되는 ‘I’m not tired’란 대목이다. 몽롱한 피아노 인트로에 이어 산사태를 연상케 하는 광포한 드럼 소리가 일순간 잦아들면서 잔잔한 피아노 선율에 얹혀 이어지는 벤 폴즈의 목소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미지의 메시지와도 같다.

힘을 돋우는 속삭임 같기도 하고 지친 몸에게 그만 쉬라고 유혹하는 찬 바람의 위험천만한 유혹 같기도 한데, 아마도 라인홀트 메스너가 등반 중에 느꼈을 고통과 인내, 그리고 끈질긴 자기 위무의 심정을 그려낸 곡이 아닐까 싶다.

벤 폴즈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I’m not tired’를 나직이 반복한다. 황홀함과 두려움, 자연의 아름다움과 광포함이 수시로 교차하는 혼란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이 노래를 들으면 열 두어 차례 같은 어조 같은 멜로디 같은 톤으로 반복되는 ‘I’m not tired’가 각기 다른 어조 다른 질감 다른 정조들이 한 덩이로 뭉친 결정의 소리라는 걸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지치고 힘든 삶의 한 노정이 꿈꾸듯 황홀한 영혼의 절경 속으로 변화하는 걸 느끼게 될 것인 지도 모른다.

그건 관광 엽서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의 가공된 아름다움 속이 아닌 삶의 가장 혼란스럽고 나약한 지점에서 비로소 죽음을 초극한 자가 내뱉는 유일무이한 울림이다.

그 울림은 삶을 향한 갈구인 동시에 죽음을 긍정하는 순간에 문득 내뱉게 되는 정신의 방언과도 같다. 그 울림을 체득하기 위해 누구는 히말라야에 도전하고 누구는 음악을 만들고 누구는 또 다른 자기만의 일에 매진할 테지만, 삶의 궁극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소리는 언제나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소리는 결코 요란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구든 자기만의 ‘비공식적 전기’를 아름답게 써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 가장 단순하고 솔직한 자기자신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I’m not tired’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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