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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7) 초고층 아파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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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7) 초고층 아파트 문제

입력
2005.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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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심의 초고층 유리건물은 오피스 빌딩이 아닌 아파트로 넘어간 지 꽤 오래되었다. 공실률(空室率)이 늘어나면서 오피스 빌딩 공사는 침체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기업 활동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이 200조니 300조니 하다 보니 이들의 주머니를 노린 새로운 건물 유형이 등장하게 되었다.

초고층 아파트이다. 형식은 오피스텔이다 주상복합이다 해서 구실을 갖추었지만 실상은 아파트 투기를 대규모화해서 판돈을 키운 것뿐이다. 오피스텔처럼 오피스 기능을 함께 집어넣든지 주상복합처럼 저층부를 상업시설로 하면 주거전용 제한을 안 받기 때문에 아파트 건물을 높이, 심지어 60층까지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을 안 고치고도, 뇌물을 먹이지 않고서도 합법적으로 60층짜리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안전한 투기판을 확보한 셈이다.

평당 분양가가 2,000만원을 훌쩍 넘는 이런 초고층 변종 아파트에서 순수한 주거 수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다.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대부분 투기 수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핵심으로 작용한다. 돈 가진 사람들에게 고급 이미지를 선사함으로써 선별의식의 허영심을 한껏 고취시켜 줄 것과 투기성과를 확실하게 보장해 줄 것이 그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투기와 허영심이라는 잘못된 목적을 위해 낸다고 낸 꾀가 가관이다. 분양가를 평당 2,000만원은 받아야 하다 보니 실내에는 쓰지도 않는 별의별 장치들이 다 들어가고 원목이다 수입 대리석이다 해서 비싼 사치재로 치장한다. 부엌 싱크대 세트만 1억이네 2억이네 하는 판이다. 우리한테는 전혀 안 맞는, 서양의 상류층이 요리사를 거느리며 사용하는 데 필요한 기능들까지 갖추고 있다. 아파트 제목이 ‘○○ 캐슬’이니 사실 이런 시설이 빠지면 웃기긴 웃길 것이다.

이런 코미디 같은 풍경보다 더 심각한 진짜 문제가 있다. 오피스 빌딩을 흉내 내 전면 유리로 짓다 보니 창이 안 열리게 된 것이다. 열리는 창은 한 구석에 손바닥만큼, 그것도 큰맘 먹고 마지못해 동냥 주듯 만들어져있다. 크기만 작은 것이 아니다. 열리는 각도가 옆으로 여는 창은 90도, 들어 올리는 창은 45도만 돼도 선심 쓴 것이고 보통은 그보다 훨씬 못하다.

사람 사는 집에서 창이 안 열린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건축하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창을 열리도록 디자인하면 프레임이 두 겹이 되기 때문에 디테일이 지저분해진다고 믿는 건축가들이 많이 있다. 이 때문에 이음새 없는 깨끗한 외관을 위해 오피스 빌딩은 보통 창이 안 열린다. 실내 열환경 문제는 기계식 강제 공기조화로 해결한다. 이런 방식은 오피스 빌딩에서조차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것이 사람 사는 집까지 지배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정말로 심각하다. 자연환기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4, 5월부터 냉방을 틀기 시작해서 10월, 심지어 11월까지 틀어야 된다. 이 때문에 햇빛 잘 드는 남향은 오히려 기피대상이 되기도 한다. 5월과 10월의 햇빛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자연관은 이미 심하게 일그러진 것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의 기와 혈이 제대로 돌 리가 없다. 호흡기와 순환기 계통의 잔병을 달고 산다. 이를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가서 간에 나쁜 독한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다. 인공성이 두 겹 세 겹으로 생활을 지배하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건강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활 전반까지 나빠진다. 청국장이라도 끓여먹거나 고등어라도 구워먹는 날이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냄새 빠지는 데 1주일 이상 걸린다. 귀찮으니까 점점 인스턴트 가공식품에 의존하게 된다. 이걸 사람 먹는 거라고 먹고 사니 몸 컨디션이 정상일 리가 없다. 가진 게 돈뿐이라고 이상한 보약이나 찾게 된다. 방송에서 운동하라고 난리니 운동이라도 해볼까 나서보지만 기껏 가는 곳은 같은 건물 내 3층에 있는 헬스클럽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종류의 초고층 아파트의 주변 환경을 보면 달리 운동할 곳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헬스클럽이라고 하지만 자기 집하고 같은 건물에 들어있으니 이곳도 창이 안 열리기는 마찬가지, 결국 인공성의 폐해가 쳐놓은 거대한 성에서 못 빠져 나오고 헐떡거리며 살과 뼈를 갉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초고층 아파트에 많이 붙는 ‘캐슬’이라는 이름이 이런 식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폐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집들일수록 자기 콤플렉스가 심해서 광고에는 꼭 자연을 끌어들인다. 창을 안 열리게 해놓고 자연이 허락했느니 자연이 지었느니 떠든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자연이 이런 걸 허락했을 리 없다. 자연이 이렇게 지었을 리 없다. 이게 요즘 평당 2,000만원을 넘어서며 가장 좋다는 집의 현실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이곳을 탈출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절대 그러지 못한다. 그럴 수 獵?사람 같았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도 않았다. 못 들어가서 난리인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에 산다는 허영심은 너무도 견고하고 완강한 것이어서 마치 노예를 묶어두는 쇠공처럼 이들의 발목을, 아니 마음을 꽉 잡고 놓지를 않는다.

무릇 집이란 바깥 공기와 숨을 통해야 건강성을 유지하게 되어있다. 추위, 더위, 비바람 등 자연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집의 기능이지만 이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쾌적한 환경이다. 자연환경으로부터의 보호는 쾌적한 환경을 돕는 선까지만 유효하다. 그 이상을 넘어서면 그것은 독이요, 더 심해지면 악이 된다. 외기를 차단한 채 냉난방이 지나쳐 쾌적한 환경을 해친다면 이것은 집의 기본 의미에서 벗어나는 짓이다.

또한 무릇 집이란 그 속에 사는 가정의 가풍과 분위기와 품격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내심의 발로가 얼굴의 인상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 선조들은 집이 갖는 이런 인상 기능에 정심(情深)이니 기성(氣盛)이니 하는 정신적, 심리적, 심미적 가치를 부여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집도 달라야 한다. 집은 주관화가 큰 건물 유형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아파트는 객관화가 높은 건물 유형이기 때문에 집의 주관화를 지운다.

그것도 모자라 객관화가 가장 심한 오피스를 닮아가고 있다. 멀리서 보면 번들거리는 멋진 유리집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자. 열리지도 않는 유리 속에 생활용품과 가재도구들이 가득 쌓여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항 속에 갇혀 헐떡이는 붕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힘들게 스스로를 옭아매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파트로 뻥 한 번 잘 치면 건설회사, 관련 공무원, 재개발 조합, 주민, 그리고 조폭까지 배터지게 챙길 수 있다.

일반론적으로 초고층 아파트는 후기 자본주의의 건축적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서양의 경우 그 곳에는 사회, 경제, 문화적 코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리는 이 가운데 ‘투기’라는 한 가지 목적에 집착하는 편집증에 해당된다. 우리의 초고층 아파트는 건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변비에 걸린 후기 자본주의시대의 부를 뚫기 위한 단기처방의 배설작용이다. 근본을 못 고친 단기처방은 항상 더 자극적 처방을 요구하게 되어있다. 돈이라고 무한정 있지는 않을 터, 초고층 아파트로 다 빼먹고 나면 그 다음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정말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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