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또는 호(胡)는 역사적으로 중국이 ‘중원 문화’ 외곽의 종족이나 문화를 멸시해서 부른 말이다. 한족 이외는 모두 문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오랑캐 문화라는 뜻이다.
이런 구별짓기에 동원되는 중요한 개념의 하나가 ‘변경(邊境)’이다. ‘문자를 사용하고 세련된 미의식을 공유하며 지적 우아함, 도덕적 규범, 사회적 질서에 대한 이상이 의례와 예식에 내재해 있는 세계’와 그런 문화적인 성취가 결여된 공동체는 변경을 따라 안과 밖으로 나뉜다.
중화(中華)주의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한족의 자의식은 참으로 면면하게도 만국이 개화(開化)한 21세기까지 흐르고 있다. 고구려사 왜곡을 도맡은 중국 사회과학원 내 연구소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변강(邊疆)’을 단순히 ‘국경선 인근 지역’이라는 의미로 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변경’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변경’에 숨어 있는 민족주의나 자국 중심주의의를 비판하면서, 특히 전근대의 변경을 여러 문화가 교류하는 유동적인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공평무사한 견지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연구소의 니콜라 디코스모 석좌교수가 쓴 ‘오랑캐의 탄생’(원제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은 중국사에서 북방 종족이 어떻게 묘사되었고, 과연 그 실체는 무엇인지를 고고학 발굴 성과와 문헌 자료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해석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은 중원은 물론이고 앞서 북방과 동서의 유목민들이 청동기 문화를 확립한 시기부터 사마천이 ‘사기’의 ‘흉노열전’을 통해 유목민 역사의 전범을 세울 때까지 장장 2,000년이 넘는 시기를 아우른 시야가 우선 놀랍다.
책을 옮긴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국내의 중국사 연구자들이 점점 더 시간의 범위를 좁혀서 시대사를 연구하는 것과 정반대”라며 “특히 고고학 성과와 사료 해석을 종합하는 역량이 감탄할만하다”고 말했다.
디코스모 교수에 따르면 중국과 북방의 변경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실증 자료는 기원전 2000년대에 해당하는 고고학 발굴 성과들이다. 하지만 중국의 영역과 다소 통합된 북방 문화 진영 사이에 변경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주(周)대에 이르면 문화적 장벽을 질러 중국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오음(五音)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머거리입니다. 오색(五色)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입니다.
덕과 정의의 원칙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사악합니다. 충(忠)과 신(信)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 악을 행하는 자들이 적(狄)입니다’는 ‘좌전주(左傳注)’의 기록에는 중화 문명권의 지배 권력이 ‘오랑캐’를 보는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중국과 북방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이념에 치우친 해석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유목민을 통합한 흉노와 통일된 중국을 통치한 한 왕조 사이의 변경이 만들어진 뒤 현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사마천의 변경이 창조된다. 동시대인들에 비해 ‘흉노에 우호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사마천은 신화시대부터 그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중국 왕조나 패권국들의 역사적 계통과 상응하도록 북방 민족의 계통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방인들은 중국의 역사를 구성하는 대등한 참가자가 되었지만 문명과 야만, 주와 종이라는 철저한 이분법의 오라에 포박되고 말았다.
저자는 “변방의 역사를 만들어진 것, 따라서 적합한 시간과 지적 환경에서 다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인식한다면 중국사 속에서 북방세력권을 나름대로 자율적이고 자체 법칙이 있으며 문화적 발전을 이룬 역사적 지역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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