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T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 Y(34ㆍ여)씨는 얼마 전 수업 중 P(11)양 어머니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다. 어머니는 드라마 촬영이 있어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고, Y씨는 “조금 있으면 수업이 끝나니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도 P양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교실은 학생들의 수근거림으로 어수선했고, Y교사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초등학생들은 ‘스타’를 꿈꾼다. 정치인이나 과학자, 판ㆍ검사나 의사, 장군 등이 선망의 대상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연예계와 스포츠계 스타가 그들의 꿈이다. 스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일부 초등학생들은 일찌감치 그 분야에 매달린다. 초등학교 수업은 당연히 후순위로 밀린다. P양도 모 방송국의 단역으로 출연하면서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씩 수업을 빠지고 있다. 상위권을 유지했던 P양의 성적은 이미 중위권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P양은 “공부는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지만 연예계 진출은 아무때나 되는 것이 아니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14일 오후 서울의 유명 연기학원 T사 연습실. 평일인데도 초등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방과 후 오후 5시까지 발성연습과 스트레칭을 마치고 바로 상황극을 시작했다. 2년째 수강하고 있는 S초등학교 4학년 B양은 “부모님이 권해서 연예인이 되고자 결심했다”며 “잘만 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유명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T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 곳을 거쳐가는 초등학생은 연간 200~300명. 이들 모두 3대 1 정도의 오디션 경쟁을 통과했지만 기껏해야 10% 정도가 연예인 반열에 얼굴을 내밀 수 있다고 귀띔한다. T사와 같은 전문 연기학원은 전국에 20여 개가 있으며, 연예기획사까지 포함하면 100여 곳에 이르고 있다. 연간 2만~3만여명의 초등학생들이 ‘제2의 보아’를 꿈꾸며 땀을 흘리고 있다.
축구와 야구, 골프 등에서 국내 선수들이 국제적 주가를 높이자, 스포츠맨 역시 스타를 꿈꾸는 초등학생들의 타깃이다.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종목은 역시 골프. PGA나 LPGA에서 적지않은 한국 선수들이 스타덤에 오른 결과이다. 강남 실내골프연습장에는 학교수업이 진행되는 시간대인데도 스윙 연습과 레슨을 받는 초등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스포츠 전문 유학원 정진호(51) 원장은 “축구와 골프 유학을 문의하는 초등학생들의 상담이 전체의 30% 정도”라며 “특히 브라질 유학파인 박주영 선수가 스타덤에 오른 뒤에는 축구유학 상담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모 어린이축구단 선수 Y군(K초등학교 6년)은 “박지성 선수처럼 되고 싶어 3학년 때 시작한 축구를 하루 5시간씩 연습하고 있다”며 “여건만 되면 브라질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축구단 감독은 “아이가 조금만 소질이 있어 보이면 무조건 유학을 보내겠다는 부모들이 많다”고 말했다.
스타를 꿈꾸는 초등학생들에게 학교수업이 눈에 찰 리 없다. 서울 강남 K고교 L(36) 교사는 “연예계와 스포츠 스타가 되려고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학교마다 5~6명은 된다”며 “이들의 학업포기는 스타를 동경하는 동료 학생들에게 오히려 ‘선망감’을 안겨주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 중 90% 이상이 결국 스타의 꿈을 접고 학교로 되돌아오지만 이미 동료와의 학업수준 차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일 수 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어린 학생들이 TV에 나오는 스타들의 화려한 단면만 보고 무모한 꿈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며 “올바른 지도는커녕 부모들이 이를 부추기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또 “그들이 선망하는 ‘TV짱’이 되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고 확률적으로도 지난하다”면서 “초등학생들이 ‘스타의 모습’에만 매달려 ‘현실과 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TV나 인터넷의 또 다른 폐해”라고 지적했다.
문준모기자 moonjm@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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