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것일까. 분명 아프리카에 왔건만, 아프리카가 아니다. 발 아래 해안선을 따라 눈에 띄는 건 흰색 지붕의 고급 주택들이다. 지중해의 어느 언덕에 선 느낌이다.
겨울로 접어 들어서일까. 이따금 부는 바람이 옷깃을 세우게 하지만 매서운 정도는 아니다. 산꼭대기에서 맞는 겨울이 이 정도라면 오히려 견딜만하다. 사방은 온통 꽃 잔치다. 아예 야외식물원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하지만 되바라지게 크고 화려한 열대의 꽃이 아니다. 소박하지만 기품을 잃지 않는 고귀함을 가졌다. 지구상 어디에서 이와 유사한 곳을 발견할 수 있을까. 혹시 사라진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 이 곳으로 공간 이동한 것은 아닐까.
테이블 마운틴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랜드마크이다. 드넓은 평지가 이어지는 케이프타운이라 거의 전 지역에서 테이블 마운틴을 볼 수 있다.
산은 산인데 단순한 산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 하나가 땅에서 불쑥 솟은 형상이다. 직각으로 깎아 놓은 듯한 바위산의 평균 해발은 1,000m. 가장 높은 맥클리어봉은 1,086m이다. 아래에서 보는 산정상은 누군가 정교한 칼로 도려낸 듯하다.
테이블 마운틴을 오르는 가장 흔한 방법은 케이블 카를 이용하는 것이다. 1929년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지금은 65인승 초고속 케이블 카가 운행한다.
정상까지 1.2㎞지만 초속 10m이니 2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발 아래로 케이프타운 시내 전경이 펼쳐진다. 바닥이 통째로 360도 회전하기 때문에 어디에 앉든 좋은 시야가 확보되는 셈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암벽 등반가들과 이따금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350여개의 등산로가 있음에도, 밧줄 하나에 목숨을 거는 그들을 보니 괜한 미안함이 앞선다.
테이블 마운틴 정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상이다. 동서 3㎞, 남북으로 10㎞가량의 평지가 이어진다. 외줄 곡예라도 벌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형이 만들어졌을까. 시간은 8억5,0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닷속 모래땅이던 이 곳이 융기를 시작했다. 수억년을 바닷속에 있었으니 지세가 단단할 리가 없을 터. 모진 비바람에 모서리가 패이고 깎여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생긴 모습은 그랜드 캐년의 한 부분을 뚝 떼어낸 것과 유사하다.
테이블 마운틴은 식물의 보고(寶庫)이다. 남아공의 국화인 킹 프로테아를 비롯, 핀보스, 에리카, 콘부시, 핀쿠션 등 발견된 식물만 1,500종을 넘는다. 남아공을 지배한 영국 전역에서 발견된 식물종보다 많은 숫자다. 단위 면적당 식물 분포 수치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작 놀라움은 이 때문이 아니다. 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은 모래 성분에 영양분도 부족해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침식이 진행 중이어서, 위태 위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연중 불어 오는 세찬 바람에 몸을 낮췄다. 모든 꽃이 갈구하는 화려함도 어느 정도 포기했다. 수많은 꽃들이 지천에 피었지만, 허리 높이를 넘는 꽃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덕분에 탁 트인 시야를 확보했다.
간밤에 쏟아진 소나기가 만들어낸 맑고 조그마한 웅덩이에 비친 꽃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한 폭의 수채화이다. 최악의 여건 속에서 거둔 최고의 결실, 테이블 마운틴의 가치가 높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랜 세월 지속된 외세의 지배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를 일궈낸 남아공 민초들의 삶의 흔적을 보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테이블 마운틴을 포함한 케이프타운 일대 식물 군락지는 드디어 지난 해 유네스코가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하기 이르렀다.
킹 프로테아가 테이블 마운틴의 식물 대표라면, 대시는 동물의 대표이다. 50㎝남짓한 동물로, 언뜻 보기에는 토끼와 두더지를 합친 모습이다. 하지만 해부학적으로는 코끼리와 가장 유사하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관광객 앞에서 풀을 뜯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먹이를 주는 것은 금물이다. 간혹 사람에게 달려들어 물기도 하기 때문이다.
얼마가 지났을까.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테이블만 뒤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자그마한 섬은 로빈 아일랜드이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에 항거하다, 18년간 옥고를 치른 감옥 섬이다. 무고한 민초를 짓밟았던 역사의 현장에 어둠이 드리운다. 그리고 이제 아프리카가 깨어나고 있다.
테이블 마운틴(남아공)=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 반도
케이프타운 시내를 벗어나 해안 도로를 달린다. 남쪽을 향해 뾰족한 송곳처럼 튀어나온 케이프 반도가 목적지이다. 그 끝에 희망봉이 있다.
148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서양인으로서는 처음 발견했다. 몇 년 후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곳을 거쳐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면서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역사 공부만 하기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 시내를 벗어나 처음 만난 곳은 캠프스베이. 한국의 강남 집값만큼이나 비싼 고급 주택가가 즐비한 곳에 호젓한 백사장이 들어 앉아 있다.
테이블 마운틴과 연결된 바위산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바위산이 정확하게 12개. 이름이 ‘12 사도’.
호트베이는 물개섬으로 가는 선착장이 있는 곳. 배에 오르니 물개와 섬에 관한 설명이 방송된다. 영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에 이어 한국어 방송도 흘러 나온다.
일주일간의 아프리카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한 한국어 안내 방송. 딴 나라 말보다 길다 싶었는데,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물개를 잡거나 해치는 행위를 할 경우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된다는 것. 괜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배를 타고 20분을 가니 물개섬을 만난다. 섬이라기 보다는 큰 바위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바위섬 위에 빽빽하게 자리잡은 물개떼는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물속에서 자맥질치는 물개까지 합치면 그 수가 5,000을 헤아린다고 한다.
채프먼스 베이를 거쳐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스카보로를 지나면 희망봉 자연 보호구가 시작된다. 도로 옆으로 피어난 들꽃 에리카, 프로테아가 어찌나 예쁜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마침내 희망봉에 도착했다. 희망봉을 보기 위해 케이프 포인트 전망대에 오른다. 희망봉과 케이프 포인트는 케이프 반도의 남단에 서로 다투듯 위치한 두 꼭지점이다.
케이프 반도의 끝은 케이프 포인트이지만, 위도상으로는 희망봉이 조금 더 남쪽에 있다. 남위 34도21분25초. 전망대로 오르는 산책로 옆으로 알로에 베라가 활짝 피어 붉은 꽃잎을 뽐낸다.
전망대 정상에서 희망봉을 내려다 본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엄청난 감동을 예상했건만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는다. 너무도 평범한 땅이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상징적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해야 할 판이다. 따지고 보면 희망봉은 디아즈와 다 가마의 착각으로 탄생한 곳이다.
그들이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곳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하지만 진짜 최남단은 이 곳에서 160㎞동남쪽에 있는 아굴라스 곶이다.
희망봉은 한국으로 따지면 두물머리나 아우라지쯤 되는 곳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여기서 만난다. 두 대양의 만나는 지점 답게 파도가 예사롭지 않다. 이 곳에 정박하려던 적지 않은 선박이 좌초되거나 침몰됐다. 오죽했으면 디아즈가 처음 이 곳에 도착해 ‘폭퐁의 곶’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더욱이 그는 희망봉을 발견한 지 9년 후 이 곳을 다시 방문하던 중 숨졌다. 정복자에게, 이 곳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 했던 것일까.
볼더스 비치는 케이프 반도의 마지막 여행지. 해변가에 조성된 펭귄 집단 서식처이다. 남극 대륙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한 펭귄이 아프리카 대륙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해변과 가까운 곳에 주택가가 형성돼 있어 다시 놀란다. 원래 이 곳의 주인은 펭귄이었다. 주택가가 들어서면서 펭귄이 급격하게 사라지자, 주민들이 펭귄 살리기에 나섰다.
관람객이 이동하는 통로를 별도로 내고, 펭귄에게 다가가거나 위협을 하는 등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자제했다. 그 덕에 이제는 수만 마리가 몰려와 유명 관광지라는 명찰을 달게 됐다. 이따금 펭귄들이 주택가에 들어와 용변을 보거나 어질러 놓기도 하지만 정다운 이웃의 애교일 뿐이다.
희망봉(남아공)=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여행수첩/ 남아공 여행
남부아프리카 여행은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금광으로 유명한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다. 그래서 남아공의 수도로 착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남아공의 행정 수도는 프리토리아. 케이프타운은 입법 수도, 블룸폰테인은 사법 수도이다.
한국에서 요하네스버그를 가려면 홍콩에서 남아공항공(02-775-4697, www.flysaa.com)을 이용해야 한다. 인천 - 홍콩 3시간 40분, 홍콩 - 요하네스버그 13시간 30분 소요. 요하네스버그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2시간 10분 걸린다. 남반구에 위치한 남아공은 현재 겨울이지만 한국만큼 춥지는 않다.
겨울 평균 기온은 5~15도 가량으로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여행하기에는 지금이 적당하다. 현지에서는 미국 달러가 통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달러로 환전한 뒤 현지 공항이나 은행에서 남아공 돈(란드)로 재환전해야 한다. 1란드는 한화 160원가량. 1달러는 6.4란드. 관광객이 250란드 이상의 물품을 구입하면 공항에서 14%의 세금을 환급 받을 수 있으니 영수증을 잘 챙겨야 한다.
▲ 숙소
남아공의 치안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유명 관광지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밤에 여행객 혼자 다니다가는 강도 등 봉변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숙소를 잘 골라야 하는 것도 이 때문. 케이프타운 워터프런트에 위치한 테이블베이 호텔은 세계 유명 잡지의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로빈 아일랜드와 테이블 마운틴을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케이프타운의 최고급 호텔이다.
아라벨라 쉐라톤 호텔은 대규모 컨벤션 센터를 소유한 비즈니스 호텔. 객실에 팩스,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고, 호텔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빼어나다.
남아공에서 치안 상태가 가장 불안한 요하네스버그의 웨스트클리프 호텔은 밤새도록 직원이 호텔 주위에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어 안전하다.
▲ 먹거리
남아공은 프랑스나 칠레 못지 않은 와인 생산국이다. 케이프타운에는 와인 랜드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 대다수 레스토랑이 자체적으로 만든 와인을 선보인다.
가격도 1병에 2만원선으로 부담이 적다. 타조 고기도 유명하다. 남아공의 타조는 오스트리치라고 불리며, 호주의 이뮤, 남미의 리마와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케이프타운의 웨스트케이프 지역에는 타조를 사육하는 농장이 많은데, 가죽 제품이나 타조알에 새긴 그림이 유명하다. 타조를 재료로 한 케밥 요리는 맛이 일품이다.
아프리카 전문 여행사 인터아프리카(02-775-7756, www.interafrica.co.kr)는 프리토리아 인근 엔타베니 동물 보호구와 케이프타운 테이블 마운틴, 희망봉 등을 둘러보는 7박 8일 상품을 299만원에 판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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