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정부, 선거구제 개편, 개헌…. 여름 정국을 달구고 있는 정치체제 개편론은 여당의 정치적 돌파구용이거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입지 다지기 용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헌법개정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민주화의 정착이 임무였던 1987년과는 다른 의미의 체제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보 사회과학계 내에서도 헌정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논의가 ‘운동’처럼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87년 체제론’이다.
노태우정권 출범 후 18년 동안 유지된 체제가 총체적 한계에 부딪친 만큼 이를 극복할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시점 상 자칫 정치적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담론이지만, 누적된 모순의 근본적 해결을 모색할 때가 됐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87년 체제 보수회귀로 갈 수도 있다"
‘창비’와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여는 심포지엄의 주제는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 ‘87년 노동체제’ ‘87년 이후 체제’ 등 노동계와 학계 일부 연구자들이 ‘87년 체제’라는 말을 거론한 적은 있지만 이 개념을 주제로 다수의 학자들이 토론하는 자리는 처음이다.
심포지엄은 ‘헌법 논의의 지평을 확대하자’는 소제목을 내걸 정도로 개헌 논의를 확산시키겠다는 실천적 의도를 깔고 있지만 ‘87년 체제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주제로 한 한신대 윤상철 이일영 교수 등의 발표는 87년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새로운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어 흥미롭다.
윤 교수는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서 87년 체제를 “초기 민주화 이행 이후 질적으로 지체된 민주주의 체제로, 제도적 수준의 정치적 민주화는 상당한 정도로 진전됐으나 제도의 실제 운영이 왜곡되고 있을 뿐 아니라, 질적 수준의 민주적 심화 역시 장애에 직면하고 있는 체제”로 정의했다.
따라서 그는 “대안적 신체제가 거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세력들이 동원되지 않을 경우, 지금의 87년 체제는 정체 뿐 아니라 동요, 또는 보수 회귀의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권력이 약해지고 시민사회가 증대하면서 87년 체제가 신자유주의 공세를 방어하지 못하거나 제도를 불안정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윤 교수는 “87년 체제는 구체제, 혹은 구지배연합을 근본적으로 퇴각시키지 못한 외적 한계만이 아니라 옛 군부권위주의체제를 극복할 총체적인 대안을 갖추지 못한 내적 한계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도적으로 민주화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갈 주도세력을 만들어내고 그 세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문제”라며 “관건은 새로운 정치연합”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87년 체제는 국가의 능력과 추격 가능성이 크게 감소한 조건에서 출범, 국가가 주춤거리는 사이 재벌이 활동 공간을 확대했다”며 “과거 체제에서 형성된 폐쇄적이고 경직된 요소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과도적이고 불안정한 체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시장에서는 기업간, 국가간 경계가 필수였으나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 안에서는 유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며 “87년 체제가 개방형 네트워크 경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를 좀더 민주적인 시스템으로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밖에도 김종엽 한신대 교수가 ‘분단체제와 87년 체제론’을,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국민헌법에서 시민헌법으로’를,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한국 헌법과 민주주의’를 발표하고, 백영서 연세대 교수 사회로 최장집(고려대), 김명환(서울대) 교수 등이 토론한다.
신자유주의는 개발독재 모순의 재생산일 뿐
이와 별개로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계간 ‘역사비평’ 여름호에 기고한 ‘한국자본주의론:61년 체제와 87년 체제’라는 글에서 87년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존 개발독재 모델은 근현대 발전사상 실로 극적인 ‘성장기적’의 모델인 동시에 심대한 이중구조적 모순과 파행성, 즉 고도의 집중 및 다면적 이중구조적 불균형과 세계시장에 대한 높은 의존에 따른 불안정을 한 몸에 지닌 극단적 모델”이라며 “한국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개발독재 모델이 갖는 중층의 모순을 발전적으로 해소, 극복한 것이 아니라 누적된 이중구조적, 외향적 모순을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사회 양극화가 대표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의 성장체제를 “대중의 참여를 배제하고 저복지-양극화 속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수동혁명의 길”로 규정하면서 “이중 혁명의 관문을 통과한 한국”에서 사회과학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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