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체육 시간이었다. 두 팀으로 나누어 축구를 하기로 했다. 학생 모두가 함성을 지르면서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지만 유독 한 아이만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인(가명)아, 너는 왜 안가니?” “저는 뛸 수 없어요. 기운도 없고 어지러워요.”
다른 애들에 비해 작은 키, 창백한 얼굴이다. 누가 보아도 어딘가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질문에 대답하는 말 외에는 별로 말이 없고 대부분의 시간도 거의 자리를 떠나는 적이 없었다. 다른 애들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재잘대며 야단법석이지만 영인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영인이의 생활 태도에 대해 세밀한 관찰을 하기로 했다. 틈만 나면 대화를 통해 마음을 읽어내고,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곧 영인이와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영인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곤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육이 어려운 실물을 대신해 곤충도감을 함께 보면서 친근감을 키워갔다. 하지만 영인이의 활동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책을 보는 것만으로는 미흡했다.
그래서 식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우선 교실에 있는 식물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꽃 이름, 꽃 모양, 자라는 모습, 식물에게 필요한 것 등. 그러다가 영인이에게 우리 반의 화분관리를 맡겼다.
영인이는 20개가 넘는 화분 식물의 이름부터 외우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백과사전이나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곤 했다. “기린꽃이 피었어요.” “ 토마토 꽃에 붓으로 꽃가루받이를 했어요.” 매일매일 꽃의 변화를 알려주면서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영인이는 곤충이나 식물과 관계되는 단원의 학습을 하게 되면 자신감이 넘쳤다. 친구들은 “영인이는 식물박사”라며 영인이의 해박한 설명을 듣기 위해 박수를 치고 부추겼다.
이제 영인이의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 환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과 허약한 체력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언젠가 힘차게 뛰어 노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최영숙ㆍ전북 김제 원평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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