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람간의 만남에서 기자와 취재원간의 만남만큼 묘한 관계도 드물다. 기자는 우선 취재원과 가까운 친분을 쌓아야 내밀하면서도 고급스런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 기자의 경쟁력은 언제든지 통할 수 있는 취재원 인맥 쌓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기자라면 아무리 가까운 취재원이라도 공적으로 비판할 일이 생기면 비판적인 기사를 써야 한다. 기자는 가끔씩 취재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도 한다. 취재원에게 껄끄러운 기사를 써야 할 때 기자는 일단 쓰고 나서 당분간 취재원의 얼굴을 피해 다니며 냉기가 가시기를 기다린다.
1970년대 워싱턴 포스트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할 당시 편집국장을 맡았던 벤 브래들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케네디 대통령에 불리한 기사를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가까운 취재원을 봐주는 기자는 무능을 넘어 부도덕한 기자로 찍혀 언론조직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미국 언론의 전설로 불리는 브래들리 국장의 증언이다.
취재원의 입장에서 보면 기자는 자기가 속한 조직의 이해관계를 외부로 널리 알리는 통로로서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조직에 엄청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취재원과 기자의 만남은 친구와 원수 지점을 언제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취재원이나 기자가 그 같은 탄력적인 이중구조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행의 늪에 빠지고 만다. 기자가 친구 쪽으로 기울면 권력과의 야합 또는 순치가 되고, 원수쪽으로 기울면 공격 저널리즘의 함정으로 빠진다.
취재원이 언론을 원수로 규정해 버리면 정치권력과 언론간의 적대관계가 지속되고, 취재원이 언론에 대해 친구가 되기만을 강조하면 십중팔구 언론자유 침해를 초래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언론과의 관계는 건전한 긴장관계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해 왔다. 말의 뜻만 보자면 언론과 권력이 서로 친구도 되고 원수도 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이중구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긴장관계가 깨지거나 이중구조가 어그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최근 노 대통령은 한겨레신문 주주의 한사람으로서 발전기금 1,000만원을 내 논란이 됐다. 청와대의 행동 자체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대통령 동정 정도의 가십 기사로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은 대통령의 기금납부를 홍보를 했고, 다른 신문들은 반발했다. 한쪽 언론은 대통령의 친구임을, 다른 쪽에서는 대통령의 원수임을 드러낸 꼴이다.
이런 기사들이 대통령이나 신문들에 어떤 이해득실을 가져올지 따지지 말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과 언론 모두 상호간의 건강한 긴장관계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선의에서 나온 작은 행동은 언론사들 사이에 다시 적과 아군의 경계를 그리는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았다.
엊그제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언론사 보도-편집국장 간담회를 열었다. 문제가 있는 대통령과 언론간의 관계를 개선해 보려는 간담회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사 편집 책임자들을 일제히 청와대에 모아놓고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그 동안의 소회를 전하는 이런 종류의 행사는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의 언론 다스리기 관행을 연상시킨다.
과거 청와대는 창간 몇 주년이 된 언론사의 사주와 편집국장 등을 불러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언론사와 친구가 되려 했다. 언론사측은 그 자리를 경영이나 취재편의와 관련한 요구를 하는 기회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번의 대통령과 언론의 만남이 담합이나 야합과는 거리가 먼 대화를 위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만남의 형식과 내용이 어색하긴 마찬가지이다. 간담회 전후해서 구시렁 소리가 들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대통령과 언론의 만남에는 왕도가 없다. 서로가 원수가 될 수 있는 친구, 친구가 될 수 있는 원수가 되면 그만이다. 억지로 친구만을 고집하거나 원수만을 고집하는 순간 오히려 어색해지고 잡음이 들리는 것이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이다.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최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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