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서신 정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지역구도의 문제’를 개탄하는 부분에 이르러선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문제를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 탓으로 돌릴 뿐 자신의 과오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진단에 올바른 처방이 나올 리 만무하다.
지역구도 타파를 정치적 신앙으로 삼은 노 대통령의 선의와 충정은 믿어 의심치 않으며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부산 지역주의에 자기희생적으로 도전했던 자신의 아름다운 과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독선의 함정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선의 함정에 빠진 盧대통령
현실을 직시해보자. 취지는 아무리 좋은 것이었을망정 지금까지 드러난 노 대통령의 지역구도 타파책은 부도덕한 것이었다. 이미 우리가 보아왔듯이 지역구도를 깨기 위한 노 대통령의 야심적인 카드는 민주당 분당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후보 시절에 구사했던 마키아벨리적인 위장술은 논외로 하더라도 민주당 분당이 겨냥한 건 부도덕 그 자체였다. 그건 분당의 와중에서 나온 신기남 의원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잘 표현돼 있다.
“호남소외론이 더 확산되고, 구주류가 신주류를 더 공격해야 한다. 호남 쪽이 흔들흔들해야 영남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다.”
이건 노 대통령의 신념이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게 뒤틀렸다. 민주당 분당 프로젝트 자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노 대통령은 그 원인 규명에 실패했다. 늘 자신의 대통령 권력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작용한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성공은 대통령 권력에 의한 ‘소용돌이 효과’ 또는 ‘협박정치’의 산물이었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듯 하다.
민주당 분당의 부도덕성은 화려한 개혁 명분과 기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저주 심리 때문에 은폐되었지만, 그 바탕에 깔린 마키아벨리적 사고가 이후 계속 드러나고 쌓이면서 노 대통령은 신뢰를 상실하는 비극에 처하고 말았다.
민주당 분당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노 대통령의 꿈이 실패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신념은 사실상 ‘영남 모독’이었다. 영호남 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영남인들이 신뢰와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프로젝트에 호응하리라고 기대했다는 건 도덕의 힘을 과소평가했거나 오랜 역사의 업보를 단칼에 날려 버리는 공을 세워보겠다는 야심에 눈이 멀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노 대통령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건 열린우리당의 호남 장악을 ‘지역주의 타파’와 ‘개혁 열망’의 승리라고 주장했던 호남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다.
민주당을 지역주의 기생세력이자 반(反)개혁 세력으로 몰아붙인 그들중 일부가 이제 와서 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는 건 자기모순의 극치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노 정권에 등을 돌리는 호남 민심을 꾸짖거나 적극적인 설득에 임해야 옳다.
'지역구도 타파' 정략으론 안돼
노 대통령의 다른 지역구도 타파책들도 한결같이 민주당 분당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지역주의의 핵심 원인이라 할 인사와 예산의 투명화ㆍ시스템화로 풀어나갈 생각은 않고 오히려 그걸 악화시켜가면서 편의주의적인 정략으로만 대응했다.
지역구도 타파는 도덕과 신뢰의 기반 위에 설 때에 가능하다. 다른 개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스스로 그런 기반을 무너뜨렸다. 그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혁도 도덕과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데, 지금 그에겐 그게 없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지금부터라도 과도한 자기몰입에서 벗어나 도덕과 신뢰를 생명처럼 아는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그의 선의와 충정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건 국가적 불행일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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