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들은 ‘권력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고들 한다. 쉽게 말해 권력은 두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권력이라고 부르는 상황적 권력인데 주어진 규칙 내에서 결과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나오도록 만드는 힘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 권력이라고 부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권력으로 경기규칙 자체를 정하고 바꾸는 힘이다. 전체구도와 판 자체를 결정하고 바꾸는 힘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심심하면 일부 거대언론이 무엇이 사회적 쟁점이 되는가 하는 의제설정권을 독점한다고 비판하는데 바로 이 의제설정권이 그 예다.
그러나 언론 못지않게, 어쩌면 언론이상으로 의제설정권이라는 구조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대통령 자신이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들이 가끔 써먹는 수법이지만 경제가 나쁘면 전쟁을 일으켜 국민의 관심을 엉뚱한 데로 유도하는 것이다.
최근의 연정파동도 이 같은 대표적인 예이다. 대통령의 생뚱맞은 문제제기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 것이다. 특히 열린우리당까지 나서 국회가 지역구도를 해소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면 야당에 총리지명권과 내각제 수준의 권력을 이양할 수 있다고 제의하고 나섰다.
난데없이 불쑥 연정 제외
아무리 노무현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탈권위주의화시켰고 4ㆍ30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해 여소야대가 된데다가 잇단 실정으로 인기가 급락해 일부에서는 레임덕까지 우려하고 있지만, 이번 파동은 의제설정권이라는 대통령의 권력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번 파동은 대통령이 의제설정권을 남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정책적 입장이 비슷한 정치세력끼리 연정은 가능하다. 또 한국정치가 지역주의 등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도입과 같은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정치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를 촉구해 왔다.
그리고 노 대통령으로서는 연이은 실정으로 처해진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의제설정권을 이용해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문제를 지금 이 시점에서, 지금과 같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의 뜬금없는 대통령의 서신형태로 제기하고 나선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하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이 점에서 이번 사태는 분명히 대통령이 의제 설정권을 남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노 대통령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선거제도의 개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는 명백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은 중대선거제가 바람직하지만 한나라당이 반대하고 있으니 권역별 비례대표제나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등을 논의하고 협상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제3기 정치개혁협의회(정개협)의 구성을 제의하고 나섰다.
주목할 것은 바로 6월 임시국회에서 제 2기 정개협이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을 제안했지만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이를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채 한 달로 안 돼 이 같은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며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대통령 의제설정권 남용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제2기 정개협의 제안 당시 이에 대해 정치권과 국민이 함께 논의해 결정하자며 권력양보 등을 제의하고 나섰더라면 훨씬 잡음없이 논의를 이끌어 갔을 것 아닌가?
자신의 문제제기에 놀라는 국민들을 보고 “이건 몰랐지”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그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왜 이제 와 뒷북치는 ‘홍두깨 정치’로 국민들을 놀라게 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그런 맛에 대통령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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