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교육과 더불어 살아왔건만, 알다가도 모를 것이 교육인 것만 같다. 예전에는 매일 저금통에 저금하듯 하는 것이 교육이었다. 교사는 학생의 머리에 매일 동전이 아니면 지폐 같은 지식을 주입시키고, 학생은 그것을 잘 간수하는 것이 학업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지나 학생이나 학부모는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푼돈처럼 쌓아올린 저금 같은 교육은 가치도 경쟁력도 없다는 사실을. 진정한 교육은 단돈 동전 몇 푼일망정 일단 자기 속에 들어오면 이자나 주식처럼 불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교육은 양적에서 점차 질적인 교육으로 기어를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최근 논술고사 강화를 두고 전개되는 정부와 일부 대학간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교육은 단순한 그 자체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적 또는 국가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질적인 교육에 대한 사회적 염원과 고교 평준화 정책에서부터 출발한 교육적 평등 개념이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강화된 논술고사를 본고사의 부활로 의심하는 다수의 국민 또는 시민단체는 경제적 양극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교육의 양극화마저 허락할 수는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 정부가 엘리트중심의 학생선발방식에 대해 어느 시민이나 단체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반대에 앞장을 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 19대 대통령이었던 러더포드 헤이즈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에 의하면 교육은 선을 지향하고 악을 최소화하면서 나아가는 사회공동체에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서, 그것의 가치는 물질적인 재산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을 얻으면 재산 또한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의 균등한 기회부여는 재산의 공평한 분배나 다름없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공평하게 사회구성원 모두가 혜택을 입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 정부정책과 반대 입장에 선 대학들은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히피아스의 사고를 연상시킨다. 즉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는 교육은 달리기에서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달릴 때 신기록을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출한 인재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우니, 평생 교육 속에 몸담고 있어도 교육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 않는가?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