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부른 워터게이트의 시발은 1971년 여름 베트남전의 비밀을 담은 ‘펜타곤 문서’ 유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정부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긴 문서가 뉴욕 타임스에 보도되자 닉슨과 측근들은 발끈,‘배관과’라는 별칭이 붙은 특별부서를 설치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더 이상의 문서 유출을 막자는 게 명분이었으나 근저엔 반전론의 확산으로부터 닉슨을 보호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닉슨의 특별보좌관 찰스 콜슨 등이 배치된 이 궁중친위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직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요원을 고용, 유출자로 지목된 다니엘 엘스버그가 다니는 정신과 의원에 몰래 들어간 것이었다.
‘배관공’들은 엘스버그를 곤란하게 할 어떤 의료 기록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1년 뒤 정적의 선거 자료를 찾아 워터게이트 호텔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하는, 보다 대범한 범죄의 훈련 기회가 됐다. 권력 누수의 보호막으로 시작된 3류 절도 사건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닉슨을 재선시키려는 광기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 워싱턴에는 워터게이트의 유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리크게이트(Leakgate)다. 아직은 워터게이트의 파괴력에 미치지 않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특급 참모인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 차장이 언론에 CIA 요원의 신분을 누설한 주범으로 확인되면서 파장이 커가고 있다. 부시의 비판자들은 ‘워터게이트보다 더 추악한’이란 수식어를 달아공격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리크게이트는 워터게이트의 변주곡이라 할 만한 요소를 갖췄다. 찰스 콜슨이 엘스버그를 옭매기 위해 그의 정신병력 기록을 뒤졌듯이 로브는 이라크 전을 비판한 조지프 윌슨 전 이라크 대사를 흠집내기 위해 국가의 기밀을 넌지시 흘렸다.
그 둘의 마음 속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군(主君)을 보호해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다.
부시 대통령이 2003년 초 국정연설에서 제기한 이라크의 니제르산 우라늄 구입 의혹을 정면 비판한 윌슨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은 이라크전의 명분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부시의 재선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선거의 귀재’ 로브에게 윌슨의 비판은 수용의 한계를 넘어 선 것이었는지 모른다.
은폐와 위증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로브의 측근은 로브가 언론에 준 정보는 오보를 막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보를 막기 위해 국가 기밀을 흘렸다는 로브측의 설명은 국가의 안보를 위해 윌슨을 탄핵할 필요가 있었다는 논리에 배치된다. 지난해 대선 전 로브가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던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로브의 시인 후 해명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닉슨을 사임하게 했던 것은 범죄 행위 그 자체가 아니었다. 범죄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속임수와 거짓말이 미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20여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재연되는 진실 게임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김승일 워싱턴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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