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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9) 蔡好基의 '수련' - 탐미의 언어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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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9) 蔡好基의 '수련' - 탐미의 언어적 한계

입력
2005.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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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48)의 ‘수련(睡蓮)’(2002년)은 여름에 읽는 것이 제격인 시집이다. 그 중심 제재인 수련이 여름꽃이어서만이 아니라, 이 시집에서 넘실거리는 관능의 물너울이 여름의 열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시집의 한 화자가 간취했듯, “아아! 여름은 끓어오르는 열정./ 모든 시간의 내부로부터 소용돌이치는/ 정열이 잎이 되고 꽃이 되어/ 여름의 꽉 찬 입술을 불타오르는 공기로 가득 채운다”(‘여름의 비밀’).

시집 ‘수련’을 읽는 것은 수련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것과 같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연출자, 또는 촬영자의 주관이 짙게 배어있다. 그는, 또는 그들은 에로티시즘의 끈질긴 탐구자이자 실천자다. 다큐멘터리 첫 장면에는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라는 자막이 붙었고, 마지막 장면에는 ‘8월’이라는 자막이 붙었다.

첫 장면에서 수련은 물과 햇빛의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하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의 보완물이거나 대체물이지만, 엔딩타이틀이 흐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수련은 나비를 놓치고 절규하는, 슬픈 사랑의 주체다.

그 사이의 수많은 장면들은 수련과 그 둘레 풍경들에 섬세하고 집요한 시선을 건네며 이 물풀이, 이 물풀의 “섬광처럼 흰” 꽃이 어떻게 사랑의 상징이자 주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들머리에 놓인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는, 그 마지막 연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에서도 드러나듯, 수련의 시이면서 빛과 물의 시다. 이것은 계시적이다. 시집 ‘수련’이 수련의 시집이면서 동시에 빛과 물의 시집이기 때문이다.

시집 속에서 물과 빛은 그저 수련의 아우라를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러는 그 자체로 집요한 탐미의 대상이 돼 ‘수련’의 에로티시즘을 떠받친다. 다시 말해, 시집 ‘수련’에서는 수련만이 아니라 물과 빛도 사랑기계로서의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

“눈부셔라, 포옹의 흔적, 물의 팽팽한 배 위에서/ 튀어 오르는 크리스털빛의 섬광들. 지난밤/ 격렬한 마찰의 뜨거운 여운이 폭발 뒤의/ 포연처럼 물의 육체를 감싸는구나!”(‘햇빛!’)라거나, “그녀의 살갗은 닿는 순간 비닐막처럼 버팅기지만/ 쉽게 열리는 문이다/ 약한 흡반처럼 빨아들이기도 한다/ 그녀의 살갗은 휘발한다/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진다//(...)// 햇빛 받아 반짝이는 은빛 유리조각/으로 파열하는/ 그녀의 머리칼 빛깔, 보라색 붓꽃들을 프린팅하여 더/ 짙어진/ 그녀의 머리칼 빛깔”(‘물1’) 같은 시행들은 물과 빛의 성애로 터질 듯 충만하다.

그 곳에서, 빛은 더 이상 수면 위에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빛과 물의 육체는 익을 대로 익어, 흐무러져, 무르녹아, 서로의 살을 탐한다. 그들의 후각은 살내를 탐하고, 그들의 미각은 살맛을 탐하고, 그들의 시각은 살빛을 탐하고, 그들의 촉각은 마침내 살집을 탐한다.

앞질러서, 이 성애의 담지자 목록에 공기를 더해야겠다. “누가 공기의 흰빛과/ 수련의 흰빛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안개 낀 새벽에 공기는 수련처럼/ 희게 빛나다가 물처럼 푸른 두께로/ 출렁인다”(‘안개 낀 새벽에’)거나 “너의 몸은 보이지 않아. 그러나 너의 몸의 미세한 부분을 확대하면 거기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 너울거리지”(‘공기1’)라거나, “수련 꽃잎의 테두리가 너를 끌어당기고/ 수련을 둘러싸고 있는 네가 흰 꽃잎을 끌어당기고/ 아, 이 탱탱한 탄력!/ 한여름 정오의 긴장감”(‘공기3’) 같은 시행들에서, 공기의 몸뚱어리와 수련의 몸뚱어리는 주객의 구분 없이 엉겨있다.

그들의 발가벗은 육체는 서로에게 후끈 달아, 더러 눈맞춤의 단계도 생략한 채 입맞춤으로, 배맞춤으로 돌진한다. 그러니까, ‘수련’의 공간은 수련과 물과 빛과 공기의 세계다. 다시 말해 이 시집 속에서 수련의 몸뚱이 둘레에는 밀레토스 철학자들의 상상 속에 존재했던 네 원소 가운데 물과 공기와 불(빛)이, 그것들의 육체가 배치되었다.

나머지 원소, 흙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서정적 자아의 발밑에, 다큐멘터리 연출자 또는 촬영자의 발밑에, 내레이터의 발밑에 있다. 화면 속에는 나오지 않지만, 흙은 사랑의 또 다른 주체를 떠받치는 발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주체에게 불행한 발판이다. 그는 말한다. “그 여름날,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어야 했다, 너를 사랑하기 전에./ 나는 흙을 딛고 서 있고/ 수련, 너는 물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을”(‘수련’). 물의 존재인 수련을 간절히 사랑하는 서정적 자아는 흙의 존재다. 그것이 이 사랑의 완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랑의 시도조차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화자와 수련을 이어주고, 소통하게 하고, 화자의 격(格)을 수련과 나란하게 만드는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공기는 수련과 화자의 콘도미니엄 공간이다.

공기는 화자의 물이다. 그래서 화자는 공기에?말한다. “당신은 물. 나는 먼 곳으로부터/ 당신의 몸을 헤엄쳐왔다./ 당신의 몸속 깊이 잠수했다가/ 8월의 긴 그림자 밑으로/ 수련처럼 떠올랐다.// 네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녹아 있어./ 수련의 속삭임과 당신의 은밀한 속삭임도”(‘공기6’).

그러나 수련과의 사랑이 완성되지 못하리라고 화자가 예감하는 것은 물과 흙이라는 디딤판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세계와 언어 사이의 간극이다.

“이 종이 안에 지베르니Giverny의 정원을 세우자. 글자들로 만든 하얀 집이 저기 보인다”(‘모네의 수련’2)라는 구절에서도 보이듯, 시집 ‘수련’은 만년의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의 제 집 정원에서 붓으로 한 일을 펜으로 시도하고 있다. 모네의 도구는 채료였으나, 채호기의 도구는 언어다.

시인은 독자에게 근엄하게 말한다. “당신은 지금 책이라는 통로를 통해 수련을 위한 언어장치들 앞에 이르게 되었다. 이 장치를 작동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능하면 재래적인 방법(글자를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만을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기를 당신에게 권한다.

그 방법은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무궁무진할 수도 있다”(‘수련을 위한 몇몇 말들의 설치’)고. 그는 또 말한다. “이 종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종이를 맞바라보면서 거기에 찍힌 글자들을 읽으려 하지 말고, 어서 이 흰 종이 안으로 들어오기 바란다”(‘수련의 육체’)고.

독자들의 능동적, 창조적 시 읽기를 당부하는 이 언사를 시인의 불성실로만, 책임회피로만 받아들일 일은 아니겠다. 시인 자신도 수련의 세계를 언어로 옮겨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와 세계 사이의 심연은 마침내 시인으로 하여금 독자에게 도움을 청하게 할 만큼 깊다. ‘수련’에는 세계를 언어로 재현하려는 시인의 안간힘과 그것의 궁극적 불가능을 토로하는 시행들이 수두룩하다.

예컨대 “무엇을 느끼니? 숨차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저녁의 수련’)라거나, “글자들은 수련으로 피지 않고, 종이 위에서,/ 물의 깊이를 갖지 않은 얇은, 종이 위에서,/ 글자들은 시든다,

말라비틀어진 잉크처럼, 종이 위에서,/ 색 바랜 잉크처럼 수련은 시든다, 종이 위에서”(‘물과 종이’)라거나, “누가 ‘수련’이라고 쓴들/ 하얀 바탕 위에 검은 흔적, /누가 그것을 너의 육체라고 하겠는가”(‘수련’)라거나 “수련, 너를 백지 위에 옮기려면/ 너를 죽여야 한다”(‘수련’) 같은 시행들이 그렇다. ‘수련’의 언어들은 수련을 향해 돌진하지만, 마침내 수련 앞에서 허물어진다.

‘수련’은 한 미적 대상의 속살에 대한 한국어의 접근 가능성을 그 극한까지 실험해보았다는 점에서 오래 기억할 만한 시집이다. 수련에 대해, 그리고 물과 빛과 공기에 대해 이토록 치열한 미적 언어적 탐구는 앞으로도 쉽게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수련’의 언어가 수련으로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거기에 산문성의 그늘이 짙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미적 재현까지를 포함한 세계의 재현에 운문보다는 산문이 본디부터 더 적합하다는 것을 뜻하는지, 그게 아니면 시인이 세계의 미적 재현에 대한 운문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렇거나, 이 여름에는 “그 어떤 말로도 호명할 수 없고/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생각도 닿지 않는/ 수련 앞에서”(‘많은 언어들이 저 물 속에 잠겨 있다’) 그 부질없는 호명과 표현을 속절없이 되풀이하는 이 시집을 한 번 읽어보자.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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