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에서 ‘공부(工夫)’는 왜 하는가 묻는다면 이는 우문이다. 절집은 공부가 다반사(茶飯事)이기 때문이다. 아니 공부말고 할 일이 없다. 스승과 제자가 또는 도반(道伴)들이 주고받는 안부는 “요즘 공부가 어떠하신가”이다. 더구나 절집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스승과 제자이거나 도반들 뿐이어서 그밖에 인연은 없다. 저 산에 서있는 바위도 흘러가는 구름도 모두 함께 성불해야할 도반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 ‘공부가 순조롭다’ 함이 가장 떳떳하고 기꺼운 선물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십이시중(十二時中)에 공부를 챙겨야한다. 차 마시고 밥먹고 대면하고 나아가 잠자는 중에도 공부하여야 한다.
꿈속에도 함께하는 공부를 ‘오매일여(寤寐一如)’, 생사를 들어 하는 공부를 ‘생사일여(生死一如)’ 이 모두 절집공부행로에 푯말이다. 고산지원법사(孤山智圓法師)께서는 ‘오호라 배움을 어찌 가히 잠깐이라도 게을리하며 도 또한 어찌 가히 잠시도 멀리하겠는가. 도는 배움을 말미암아 열리고 성현의 자리 또한 도로 인해 이를 수 있거늘 도 가히 잠시도 여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저 성인도 또 현사도 반드시 배움에 있거늘 성현 그 아닌 이들이 어찌 배우지 않고 사람이 되려 하는가. 배움은 음식 의복과 같아서 성현 그리고 중생이 비록 다르지만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추우면 옷입음이 다르지 않듯이 배움 또한 그와 같다’ 하였다.
승가(僧伽)에서는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을 모두 들어 계정혜삼학(戒定慧三學)을 익힘을 공부라 한다. 몸과 말과 의식 곧 인간의 모든 조건을 다 들어 공부해야 함이다. 말이나 글로 함이 몸으로 행위함과 다를 수 없으며, 몸 그 깊숙히 가려진 의식이 몸 그 밖의 행위들과 어긋남은 공부라 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지켜감과 다스림과 지혜로움이 하나되는 공부를 삼학이라 함이니, 계학(戒學)은 지범지계(止犯持戒)함이어서 돌이켜 다시 하지 않아야 할 것과 애써 맹세코 지녀야 할 아름다운 행위들을 가늠해 지켜가는 공부요. 정학(定學)은 분출하는 의식의 파고를 진정시켜 제법의 실상에 점입하는 관건이니 매사에 평등일여(平等一如)한 삼매를 견지함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혜를 체득하고 발현함이 혜학(慧學)이다. 삼학이 서로 의지해야 함에 솥의 세 다리가 의지함과 같아야 하나니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산업화한 근대인류가 속도와 효율 그리고 경쟁을 부추겨 지식을 생산함을 대개 교육의 목표로 삼음이니, 이를 교육 즉 ‘가리켜 기름(敎育)’의 공부라 한다면 이는 거듭거듭 회심하고 긴급히 바로 잡을 일이다.
이렇듯 삼업을 다하여 삼학을 구현함에 끊임없이 전승해온 인류문명의 찬란한 유산이 있다. 그것을 경률론삼장(三藏) 즉 대장경(大藏經)이라 부른다. 2,600여년 전 석존에 의해 시작된 불교는 동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역동적 전승의 역사를 이어 왔다. 물리적 규모로 이해한다면 팔만여 목판이 소장되어 있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이를 보존하고 있는 크나큰 집 장경각을 떠올리면 된다. 세계문화유산 중에 유산이다.
세계의 어떤 지성들도 그 앞에 서면 경탄과 숙연함에 옷깃을 여민다. 현재 전하는 동아시아 전역에 한자대장경은 25여종에 이른다. 그러나 그 전승의 정교함과 새김에 아름다움에서 고려대장경판은 그 중에 으뜸이다. 대장경을 전승한 우리 조상들의 정성과 솜씨를 근거한다면 한국인은 거칠고 대충이다 함은 요즘 우리시대 우리들의 허물에 한할 부끄러운 일이다.
이렇게 삼장에 담겨 전한 삼학의 가르침을 삼업을 다하여 공부하는 일이 절집 즉 치문(緇門)의 다반사다. 이 길에도 몇 가지 요문(要門)이 있다. 공부는 스승과 도반 없이 할 수 없다.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하였으니 새가 장차 쉬고자 함에 반드시 숲을 찾고 사람이 배움을 구함에 마땅히 스승을 구한다 하였다. 나 또한 잊지 못 할 스승들이 계셨다.
근대한국불교 계단정화와 계율중흥을 원행하셨던 은사 자운대율사(慈雲大律師), 경학의 스승이시며 한글역경을 주도하셨던 운허(耘墟)스님과 영암(暎巖)스님 등은 후배들을 위해서는 대낮에도 수고로이 등불을 드실 만큼 엄격하고 자애로운 스승들이셨다. 승가의 지혜는 사자상승(師資相承) 곧 사람사람에 일일이 등불을 전하는 전등(傳燈)의 역사에 의해 더욱 철저하게 이어왔다. 혜가스님처럼 팔을 베어 가르침을 구하는 살신(殺身)의 구법(求法)과 몸을 버려 후래(後來)를 깨우치는 스승의 엄한 자애심은 정신의 불멸을 존속시킴에 있어 으뜸의 전통이다. 선종의 이심전심교외별전(以心傳心敎外別傳)은 이 전통의 꽃으로 존숭되어 온다.
공부는 또한 나를 비우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법운법사는 진리를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버려야 한다 하였으니, 구마라즙(鳩摩羅什)이 처음에 소승에 나아가 있어 반두달다(盤頭達多)에게 엎드려 공부하였으니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戀求?귀존(貴尊)의 예를 갖추었으나 후에 대승을 성취한 구마라즙에게 다시 반두달다가 엎드려 공부하니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배움이라 존현(尊賢)이라 하였다.
반두는 구마라즙에게 이르길 ‘당신은 나에게 대승의 스승이나, 나는 당신의 소승의 스승이었을 뿐이네’ 하였다. 마음을 비워 공부함에 있어 사해(四海)안에 모두가 형제(兄弟)이며, 중생(衆生)이 모두 깨달음의 스승들이다. 요즘 공부하는 이들이 시대와 스승을 탓하나 길이 없어 가지 못함이 아니다. 선현의 가르침이 있으나 배워 따르려 하지 않음이다(不習誦이면 無以記니라). 우리의식의 불순(不純)함을 돌이켜 원숭이와 폭류(暴流)에 비유하였다. 순간의 순일함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창의와 새것을 도모함이 틀린 일은 아니다. 허나 옛 것을 이어 전하고 배움이 없다면 문명을 계승한 인류라 할 수 없다. 가섭과 아란이 팔만법장을 완전하게 외워 전하고 장로대중이 이를 습송하였으며 서역동하(西域東夏)의 고덕(高德)들이 외워 전하니 팔만법장이 오늘에 남겨전하는 것이다. 또한 ‘공부인(工夫人)이 써서 전하지 않으면 영원할 수 없다’하였으며 널리 배워 익히지 않으면 근거함이 없어 망녕되이 전하게 됨이니, 옛 공부인들이 스승과 지혜를 찾아 목숨을 버려 구법함이 다 이 일이다.
내 이른 나이에 출가하여 때론 학인들과 함께 하고, 때로는 주지 소임에 젊은 날을 보냈던 제2의 고향 가야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각이 우뚝하다. 한반도의 심장처럼 숨쉬고 있는 그 법보전은 내 정신의 지도에 나침반이 되었다. 해인사 외에도 전국에 유서 깊은 사찰은 그 도량과 회상에서 공부하던 이들을 위해 경률논서나 의식규범 등을 출간유통하는 자체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니 사간판(寺刊版)들이 그것이다. 해인사에도 국간(國刊) 외에 귀중한 사간판이 따로 보존되어 있다.
이렇듯 바다보다 깊고 너른 저 삼장의 바다 아니 광대한 동아시아 수 천년의 지혜는 이렇게 전승되어 왔다. 후학을 지도하는 선생이 되고 아직껏 책상물림을 하지 못함 또한 이에 연유함이다. 문자 즉 한자연대로 소급한다면 동아시아인류는 유로화폐나 유럽연합에 비할 바 아니다. 문자는 정신과 문화의 지도를 그리거나 읽는 도구다. 옛사람들은 정신의 지도를 그리고 전승함에 막힘이 없었다. 근대 이전 활발한 동아시아지성사 교류는 요즘의 컴퓨터만큼이나 전달에 장애가 없었던 한문문화권에 근거한다. 연대(連帶)는 우정(友情)과 소통(疏通)에 근거하고, 우정은 서로 떳떳하게 다르고 힘 있을 때 아름답다.
따라서 한글 즉 아름다운 우리글의 자긍심은 우정의 갑옷과 같다. 더불어 이웃과 활발하게 정신과 문화를 같이 읽고 동행할 수까지 있다면 그보다 더한 우정의 연대는 없다. 서로를 이해하는 떳떳한 지성들의 연대가 그물처럼 장엄하여,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 얼룩진 테러와 전쟁은 물처럼 녹이고, 지구촌 구석구석에 다듬고 보존해야 할 지혜로운 유산이 인류 모두의 지혜로 활발해 질 일은 바로 공부인들에게 희망하는 바다.
수 천년 유장하게 동행해온 동아시아지혜의 여정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장막으로 한없이 혼미한 때 스승이라 부르는 자리에 있으니 학인을 대할 책무에 책상머리에서 새벽을 맞이함이 예사다. ‘한국불교소의 경전’에 대한 연구, 고승비문들의 교감역주, 사전작업 등 이 모든 일은 내가 은혜입은 부처님과 선현들의 지혜를 다시 후래에게 전해야하는 계왕개래(繼往開來)의 책무이고, 그 은혜에 보답함이 나의 공부다.
● 지관스님은…
불교계에서 최연소 강사(27세) 최연소 주지(38세) 최초의 비구 대학총장이라는 기록을 세운 최고의 학승으로 꼽힌다.
1932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47년에 해인사에 출가했다. 이때의 은사가 성철스님과 더불어 양대 율사로 불리던 자운스님. 이어 동국역경원을 세워 팔만대장경 국역에 앞장선 운허스님에게서 경을 배웠다. 59년에 해인강원의 강사, 70년에 해인사 주지가 되었다. 동국대 총장(86~90)을 지냈으며 91년 가산불교연구원과 불교원전전문학림인 삼학원을 세워 불교 연구자들을 키우고 있다. ‘한국불교소의경전 연구’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연구’ 등을 통해 불교사료를 연구할 바탕을 만들었으며 요즘도 매일 불교대백과사전인 ‘가산불교대사림’ 편찬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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