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해서 이리저리 쌓아올린 TV브라운관의 조형적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이라면 적잖이 놀랄 듯 싶다.
서울 청담동 박영덕화랑에 걸린 이 대가의 10호 남짓한 평면회화가 걸렸다.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위트로 붓 가는 대로 장난스럽게 그린듯한 그림 속에서 작가는 폭포수 아래 초가삼간을 짓고 사는 촌로의 모습으로 환생했다(‘청경야독’ㆍ1996년작). 걸출한 예술가가 내비치는 자전적 고백처럼 보이는 그림은 소박해서 여운이 더 깊다.
박영덕화랑이 6일부터 시작한 ‘New Paintings of Masters(대가들의 새로운 회화)’전은 너무나 잘 알려진 대가들의 드물게 보는 회화작품들만 집중소개, 거장의 새로운 면모를 엿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작가는 백남준을 비롯 김창열,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안서보 등 한국 화단의 대표작가 6인이다. 이중 미술 컬렉터들의 관심이 집중되고있는 작품은 백남준의 1996년작 ‘TV자화상’. 생동감 넘치는 붓 자국과 발랄한 색채감각을 통해 수없이 복제되고 의인화된 사각의 TV브라운관들을 그려냈다.
김희승 큐레이터는 “작가의 유명세는 물론 일반에 거의 공개되지않았던 캔버스 회화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구매문의가 줄을 잇고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백남준의 회화작품은 모두 4점이다.
1970년대부터 반복적인 선 긋기 작업으로 독특한 모노크롬 회화를 선보여온 박서보는 이번 전시에 ‘믹소그라피아(mixografia)’ 작품을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믹소그라피아는 입체판화로, 한 장의 판화 안에서 3, 4층까지의 입체표현이 가능한 것이 특징. 세계적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렘바공방에서만 제작할 수 있는데 박서보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믹소그라피아 기법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짧게 끊어지는 속필기법이 다채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며 평면에 사유의 공간을 불어넣는 작품들이다.
‘여백의 예술가’로 불리는 이우환은 거의 형광색에 가까운 연두와 오렌지 색이 백색 화면을 압도하는 듯한 독특한 드로잉작품을 내놓았다.
청색이나 청회색 등 극도로 제한된 색상에 화면 위를 부유하는 듯한 붓 자국으로 명상의 세계를 표현해온 종전 작품세계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여백의 힘은 여전하지만 화면은 침묵 대신 다정하게 이야기를 속살거리는 듯 따뜻하다.
이밖에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은 바탕 칠이 되지않은 거친 마대나 모래판, 결이 살아있는 나무 판 등을 이용해 물방울과 배경이 대조를 이루며 표현방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또 한국추상미술의 1세대인 정상화는 뜯어내기와 메우기를 통해 화면에 미묘한 두께를 부여하고 마치 창호지 문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캔버스에 유기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독특한 작품들로 관객을 만난다.
이들의 뒤를 이어 한국 화단의 대표작가로 부상중인 안병석은 갈대밭의 이미지를 무수한 바탕 칠과 이 칠을 긁어내는 스크래치기법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는 30일까지. (02)544-8481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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