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정희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여론조사를 보면 영 기분이 언짢다. 의로운 사람들을 수없이 감옥에 보냈고,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피눈물을 안겼던 박 전 대통령이 어떻게 존경받는 대통령 1위를 기록한단 말인가. 벌써 그 시절의 눈물과 고통, 숨막힘을 잊었단 말인가.
그러나 국민 다수가 그를 존경한다는데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현실인데. 국민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집권세력의 중심 인사들은 국민이 미망(迷妄)에 빠져있다고 개탄한다.
누가 옳을까. 결론은 자명하다. 국민이 옳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이다. 혹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우민(愚民)주의나 포퓰리즘의 산물이라고 분석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지금 존재하지 않고 추종자들도 권력 수단에 접근하지 못하는 야인이기 때문에 그런 폄하는 적당치 않다.
이제 논점을 좁혀보자. 왜 많은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꼽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박 전 대통령이 외쳤던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정치적 술수로 보지 않고 충정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코드로 말하면 박 전 대통령의 코드는 ‘백성’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 시절의 혹독한 압제 속에서 정의와 진실을 지켰던 사람들, 5공 군사정권의 철권통치에 맞서며 민주주의를 외쳤던 의로운 사람들이 집권을 했는데도 왜 국민은 지지를 보내지 않는가. 그 어려운 시절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고, 가정이 풍비박산났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이보다도 복장이 터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답 역시 복잡하지 않다. 집권세력, 그들의 코드가 국민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부터 국민의 코드와 엇갈려있다.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에 집착한다. 책임총리제를 힘주어 강조한다. 최근에는 연정론을 꺼냈다. 이들 논리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삶과 직접 닿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당정분리나 책임총리제는 수단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인 국정운용을 할 수 있느냐는 차원에서 고안된 방법론일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수단이 목적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정치논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국민의 마음은 멀어진다. 자신들과 동떨어진 얘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 단순하다. 내 집을 마련하고, 일자리를 찾아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 잘 가르치는 게 가장 절실하다. 속된 말로 등 따습고 배부른 게 우선적인 덕목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 만큼 현명하고 진실한 것도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통치자에게는 복잡한 논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 단순명쾌한 논리만 있었을 뿐이다.
중국 현대사에서 최고지도자로 꼽히는 덩샤오핑(鄧小平)도 흑묘백묘론(黑苗白苗論ㆍ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을 설파하지 않았던가. 수단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다. 코드를 복잡한 정치논리가 아닌 백성의 삶에 맞추자. 그것이 노 대통령이 살 길이고 이 정부가 지지를 회복하는 길이다.
이영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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