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드 다이아몬드 등 지음ㆍ임지원 등 옮김 / 사이언스북스 발행ㆍ각권 1만3,000원
불황이라는 악조건에도 별로 굴하지 않고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 꾸준히 시장을 넓혀가는 출판 분야 중 하나가 ‘과학’이다. 1990년대 말부터 이른바 ‘종합 출판’을 지향하는 규모 있는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과학서 출판 시장에 뛰어들었다.
거의 물리학 책만 전문으로 내는 ‘승산’ 같은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번역물 위주인 시장에서 토종 물리학자 정재승이 쓴 ‘과학콘서트’ 같은 교양물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반가운 현상도 벌어졌다.
하지만 과학책을 내거나 읽는 것은 출판사나 독자 모두에게 여전히 딜레마다. 교재 출판을 제외한다면 출판사는 전문서와 청소년 층이 읽을 만한 얕은 교양서 중에서 갈등하게 마련이다.
중고교 과학교과서의 내용을 재미 있게 풀어서 소개하는 정도의 책만 낼 수 없다며 수준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안 팔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독자 역시 대중교양서로는 성에 안 차지만 ‘명저’의 전문성을 따라잡기는 힘에 부친다. 그만큼 깊이와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과학책에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이번에 번역해서 낸 ‘사이언스 마스터스’가 반가운 건 그 때문이다.
이 시리즈물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수학, 정신의학, 언어학, 진화론 등 과학 전반의 주제를 말 그대로 1급의 과학자들이 직접, 대중을 위해 알기 쉽게 쓴 책들을 모은 것이다.
필자 목록에는 퓰리처상을 받은 저술가 제러드 다이아몬드, 베스트셀러 화학 저술가 피터 앳킨스, 뛰어난 우주론 해설가 폴 데이비스, 고인류학의 대가 리처드 리키, 암세포의 발생과정을 밝혀낸 로버트 와인버그, 당대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받는 에른스트 마이어와 리처드 도킨스, 인지과학의 석학 대니얼 데닛, 공생진화론의 창시자 린 마굴리스 등 평소 조금이라도 과학 분야에 관심 있던 사람이면 귀에 익은 이름들이다.
학문적 업적이 높다고 대중적인 글 재주까지 기대할 수 있는 건 물론 아니지만 이 책은 ‘가독성’ 면에서도 전체 평점이 B학점 이상이다. 몇몇 책은 뛰어나게 재미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는 다이아몬드 UCLA 교수의 ‘섹스의 진화’(원제 ‘Why is sex fun’)이다. 세계적인 진화론자이자 생리학자이며 한반도에서 대량 이주가 일본 문화의 기틀을 잡았다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문명사에도 큰 관심을 보여주는 다이아몬드 교수는 인간의 섹스는 왜 동물과 다를까라는 궁금증을 이 책에서 풀어준다.
개가 인간을 보며 하는 말이다. ‘저 구역질 나는 인간들은 한 달 중 아무 때고 섹스를 하더군. 바바라는 말이지 자기가 뻔히 임신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을 알고도, 그러니까 말이야, 생리 직후 같은 때에도 남편을 슬그머니 꼬이더라고.
존은 어떻고. 허구한 날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요. 자기가 용을 쓰는 게 애를 만들려고 그러는 건지 헛짓거리를 하는 건지는 전혀 관심 밖이야. …아, 더 끔찍한 얘기도 있어.
저번에는 존의 부모가 놀러왔는데, 세상에, 그 노인네들조차 섹스를 하지 뭔가? 존의 어머니는 폐경인가 뭔가 하는 걸 겪은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다고. …그런데 진짜 이상한 건 바로 이거야. 바바라와 존도 그렇고 존의 부모도 그렇고 다들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모르게 섹스를 하지 뭔가. 마치 무슨 죄라도 짓는 것처럼 말이야.’
다이아몬드 교수는 시도 때도 없는 섹스를 배란 현상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로 해석한다. 여성은 자식을 돌보는데 일조하도록 남성을 붙잡아두기 위해 배란을 감추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또 폐경은 나이든 여성이 출산과 양육의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해주었고, 그래서 오래 산 노인들이 부족의 문화와 역사를 전할 수 있었다는 문명사적인 역할과 결부시켜 풀이한다.
‘주기율표를 원소들이 각기 여러 지역을 이루고 있는 상상 속의 나라에 대한 일종의 여행 안내서’처럼 재미나게 설명해가는 앳킨스 옥스퍼드대 교수의 ‘원소의 왕국’, 우주의 출발인 대폭발에서 종말인 대붕괴까지 현대 물리학의 발견을 설명한 데이비스 호주 매콰리대 교수의 ‘마지막 3분’은 이미 화학과 천체물리학 분야 교양서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90년대 중반 동아출판사에서 국내에 소개한 시리즈지만, 이번에는 그때 나왔던 10권을 포함해 원서를 낸 영국 오리온출판 그룹이 기획한대로 22권 전질 모두를 번역한다.
내년 말까지 완간될 책 중에는 이언 스튜어트의 ‘자연의 수학적 본성’,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 밖의 강’,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의 행성’, 존 배로의 ‘우주의 기원’, 대니얼 데닛의 ‘마음의 진화’,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 스티븐 핑커의 ‘언어와 규칙’, 마빈 민스키의 ‘생각하는 기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북디자이너 안지미씨의 표지 디자인도 꽤나 멋지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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