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PPA 감기약’ 복용자가 한 법무법인의 모집으로 집단소송에 참여했다가 병원서 신체감정을 받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자 법무법인이 소송에서 손을 떼는 바람에 손해배상은커녕 수백만원의 소송비용만 떠안게 됐다.
PPA(페닐프로판올아민)는 출혈성 뇌졸중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성분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해 8월 이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에 대해 미국 등 다른 나라보다 4년이나 늦게 판매금지 조치를 내려 파문을 일으켰다.
부산에서 노부모를 모시고 어렵게 살아온 김모(59)씨는 지난해 2월 어지럼증과 마비 증상을 느껴 병원에 갔다가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병원신세를 지게 된 김씨는 6개월 뒤 감기약 파동이 일자 과거 자신이 복용해 온 감기약이 뇌출혈의 원인이라고 의심하게 됐다.
김씨는 D법무법인이 ‘PPA 감기약’ 피해자들을 모아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고 병원비라도 보탤 생각으로 소송을 의뢰했다. D법무법인은 며칠 뒤 김씨를 대신해 제약사 3곳과 국가(식약청)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하지만 김씨는 수백만원 상당의 병원 신체감정 비용을 댈 능력이 없었고, D법무법인측은 김씨의 변호는 무료로 해줄 수 있으나 신체감정 비용까지 대신 지불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약간의 재산마저 병원비로 모두 사용하고 친인척에게서 생활비를 빌려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던 김씨는 소송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후 D법무법인은 김씨 소송에서 손을 뗐고 김씨는 소송 상대방인 제약사와 국가에게 소 취하 의사를 밝혔다. 민사소송법상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만 취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약사들은 소 취하에 동의했지만 국가는 소 취하에 응하지 않았다. 이참에 법적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 추후 유사소송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결국 김씨는 소송대리인의 도움 없이 아무런 증거 자료도 낼 수 없었고, 서울중앙지법 민사89단독 박남천 판사는 지난달 15일 원고패소 판결했다. 법원 관계자는 “김씨는 자신과 상대방의 인지세, 송달료,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까지 합해 적어도 300만~400만원 가량의 소송비용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의료소송에서 신체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법조계의 상식인데 법무법인측이 피해자에게 이 같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법무법인이 법적 책임은 없을지 몰라도 도의적 책임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에 대해서도 “국가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신체감정서를 제출한 다른 사건에서 제대로 된 법정 공방을 통해 했어야 한다”며 “굳이 변론 능력도 없는 가난한 피해자를 상대로 끝까지 소송을 고집했어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D법무법인측은 “사전에 신체감정 비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금액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던 것 같다”며 “우리도 개인의 경제사정을 일일이 파악하지 못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13일에도 D법무법인이 주도했다 손을 떼고, 국가는 소 취하에 동의하지 않은 또 한건의 감기약 소송 판결이 예정돼 있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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