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는 맛있고 예쁜 것만 보면 내 생각을 한다. 나 어릴 적부터, 좋은 데 다녀 오시는 날에는 꼭 나를 위해 맛난 것을 싸오곤 했으니까.
딸 하나인 나는 마땅히 놀 사람도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가 모임에서 돌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엄마가 가방을 열면 커다란 냅킨에 싸여진 생과자며 쿠키나 예쁜 떡이 나왔다. 요즘도 엄마는 내가 생각나는 음식을 보면 싸오신다.
며칠 전에는 말린 오렌지 껍질에 쵸컬릿을 묻힌 디저트를, 또 어느 날에는 밤, 대추, 석이버섯을 곱게 다져서 고물로 묻힌 삼색 단자 떡을 싸오셨다. 손수건에 두 조각 얹어서 고물 가루 떨어질라 돌돌 말아 오신 엄마는 참 다정하다. 그리고 알뜰하다.
▲ 허브 빵
선진국의 대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배울 것 천지다. 나는 선진 대도시의 구성원인 시민들 하나하나의 일상적인 습관들을 관찰하곤 하는데, 레스토랑에 가면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도기 백(doggy bag)'. 먹다 남은 음식을 싸 달라고 요청할 때 쓰는 말이다.
단어 상으로는 남은 것을 싸가서 개밥이라도 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독신자들이나 요리하기 귀찮은 사람들은 남은 빵 한 조각 까지 챙겨 가서 한 끼 식사를 그것으로 해결한다. 예를 들어 중국 음식점에 갔을 때 군만두 혹은 후식으로 나오는 찹쌀 튀김 같은 것이 남았을 때에도 싸오는 우리 엄마.
엄마는 버려질 뻔했던 찹쌀 튀김을 싸와서는 집에서 식구들이 출출해 할 때 한번 바싹 튀기고 설탕, 계피 가루 솔솔 뿌려서 차 한 잔과 곁들여 준다.
이렇게 알뜰한 엄마를 보며 자란 나도 남은 음식 싸오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특히 양식당에서 주는 빵은 집으로 가져온 다음 생 허브나 마늘과 굵은 소금, 올리브유를 첨가하여 오븐에 다시 구우면 집에서 갓 구운 듯 맛있다.
▲ 초면
생면을 한번 데쳐서 다시 튀겨낸 면 요리를 ‘초면’이라고 한다. 제대로 맛을 보려면 튀겨낸 면 위에 여덟 가지의 맛깔난 재료를 소스와 덮어 나오는 ‘팔진 초면’을 먹어 봐야 하지만 집에서 시도해 볼 수도 있다.
탕수육이든 고추 잡채든 먹다 남은 중국 음식을 집에 싸 오면 마트에서 구입한 생면을 튀겨내 그 위에 부어 먹는다.
소스가 좀 질척해야 맛있으므로 뻑뻑해 졌다 싶으면 육수와 녹말 물에 간장과 식초로 간을 하여 섞거나 굴 소스와 야채를 볶아서 섞어 쓴다. 남은 볶은 밥은 달걀 한 개를 풀어서 섞은 다음 고슬하게 팬에 볶아 내면 다시 새 밥 같다.
아니면 중국 음식점식의 오므라이스처럼 볶음밥에 당근을 더 썰어 넣고 케첩에 비빈 다음 달걀옷을 입혀 내도 맛있다. 남은 피자를 싸 왔을 때는 가장자리의 두꺼운 크러스트를 떼어 내고 삶은 고구마를 으깨서 버터, 설탕에 버무린 속을 얹는다.
피자 치즈를 잔뜩 뿌려서 오븐에 데우면 요즘 한창 잘나가는 고구마 피자 안 부러운 맛. 고기를 구워 먹고 남았을 때에도 집에 가져온다.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넣어 한번 끓이고 소고기는 다져서 밥 볶을 때 넣을 수 있다. 모듬전에 동동주를 먹다가 전이 몇 점 남으면 은박 포장지에 싸달라고 부탁한다. 남은 전을 대충 썰어서 춘권피에 올리고 착착 접어 아물려서 기름에 튀겨내면 초간장과 곁들여 좋은 간식이 되니까.
▲ 남은 술 칵테일
이런 말 하면 “그 여자 인심 한번 짜네”라는 소리 들을지도 모르지만, 난 가끔 남은 술도 집에 가져온다. 그런 날이 있지 않나, 딱 한잔의 잔술이 당기는 날 말이다.
소주나 이과두주를 한 병 시켜서 딱 한잔만 마시고는 “아주머니, 이거 많이 남았으니 저 가져가요”하고 당당히 챙긴다. 또는 와인 바에 간 날, 마시고 또 마시다 와인이 병 밑 둥에 남으면 코르크 마개로 꾹 눌러 막고는 집으로 가져온다.
얼마 전에는 양철 테이블이 아무렇게나 깔린 돼지 갈비 집에서 복분자주를 마시다가 집에 가져온 일이 있었다. 복분자주에 레몬향이 섞인 토닉 워터를 넣고 남은 과일 끄트머리를 잔뜩 썰어 넣은 후 냉장고에 두었더니 온 가족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날이 더워서 저녁 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모두들 지치고 입맛이 없는데, 남은 복분자주 혹은 와인으로 과일 칵테일을 만들어 두니까 한 두 모금 식전주로 그만이었던 것.
남은 소주 역시 집에 가져오면 김이 빠져서 소주 특유의 ‘쌩’한 맛은 이미 없을 테니, 얼음에 붓고 사이다와 매실즙 혹은 레몬즙을 섞어서 마시면 낫다.
남은 음식을 싸 달라고 식당 측에 요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꺼려한다. 반대로, 음식이 남았을 때 싸 달라고 손님이 요구하면 식당 측에서는 그 용기에 응당 싸 주어야 한다.
음식을 잔뜩 주문해 놓고는 맛만 보고 남겨버리는 ‘졸부스러운’ 과시는 더 이상 부의 표시가 아니다.
장안의 부자들에 대해 쓴 베스트셀러 만화책을 읽고서 한국의 소리 없는 부자들이 얼마나 꼼꼼히 밥알을 모아서 이뤄냈는가 감탄했기에 ‘남은 음식 활용기’를 써 보았다.
로또에 당첨되고, 여기 저기 사 둔 땅이 운 좋게 대박 나서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내가 먹던 밥을 집에 싸 오는 용기도 부자가 되는 첫걸음인 듯 하다.
푸드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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