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보수파는 노무현 정권에게 ‘포퓰리즘 정권’이라는 딱지를 붙여왔는데, 포퓰리즘을 그렇게 정치공세의 용도로만 써먹지 말고 한국사회 전체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다시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즉,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포퓰리즘의 정신과 실천에 충실한 ‘포퓰리즘 공화국’일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보통 ‘반(反)엘리트주의적인 대중영합주의’로 통용되는데,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혐오요, 둘은 대중에의 직접 호소다.
한국의 불행한 근현대사는 대중이 엘리트를 불신하고 혐오해야 할 충분한 근거를 제공했으며, 초압축 성장으로 인해 권력과 부의 정당성이 의심받으면서 평등주의 정서가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게 바로 포퓰리즘이 잘 먹혀드는 배경이다.
'정치 저주' 대중심리 이용 집권
그러나 대중은 도구로 이용되는 것일 뿐 주체는 아니며, 포퓰리즘에 의한 기존 엘리트 물갈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신구(新舊) 엘리트간 밥그릇 교체로 끝나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고속 출세한 사람 치고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하지 않은 사람 있는가?
지금도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는 ‘정치 혐오’, 아니 ‘정치 저주’는 다분히 포퓰리즘의 산물이다. 독재세력이건 민주세력이건 신진 집권세력은 늘 한국인의 정치에 대한 저주 심리를 이용해 엘리트 물갈이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 보면 무언가 혁명적으로 바꾸겠다던 이들이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물론 과거에 비해 더 나아진 점도 있었겠지만, 처음에 큰소리쳤던 것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곤 했던 것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어떤 정치세력이 기존 정치를 저주하는 포퓰리즘 수법을 쓰면 또 지지를 보내줄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이른바 ‘가치 패러독스(value paradox)’ 현상 때문이다. 이는 평소 삶에 녹아있는 가치와 정반대되는 가치를 의도적인 활동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역설로 정의할 수 있겠다. 개인주의적인 서양인들이 공동체 활동에 굶주려 있다거나 집단주의적인 한국인들이 개인주의를 예찬하는 게 바로 그런 역설에 속한다.
한국인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 질서에 순응을 잘 하는 사람들이다. 5ㆍ18 학살의 주범인 신군부 세력을 7년간 얌전하게 견뎌낸 국민이 아닌가.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쓰레기 분리 수거를 보더라도 이 지구상에 한국인처럼 정부의 말을 잘 듣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들은 포퓰리즘에 매혹된다. 포퓰리즘은 평소 말 잘 듣는 한국인에게 허용된 저항의 축제이며, 인터넷은 그 축제의 일상화를 몰고 왔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구조의 문제는 비켜가면서 ‘의인화ㆍ개인화’ 수법을 통해 분노를 결집ㆍ폭발시키기 때문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데엔 오히려 방해가 된다.
포퓰리즘 키우는 한국인의 특성
최근 영화계의 ‘스타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도 전형적인 포퓰리즘 수법이었다.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극장 체인을 가진 대기업 자본의 ‘스타 선호’와 부율(수익분배비율) 문제 등 핵심은 비켜간 채 스타의 ‘인간성’ 문제가 부각되는 어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독특한 기질을 제대로 꿰뚫어 본 영악한 대응 방식이었다.
어느 스타를 향해 “돈 너무 밝히지 마세요”라고 면전에서 충고했다는 어느 젊은이의 행태는 한국이 늘 여론재판에 좌지우지되는 ‘포퓰리즘 공화국’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한국인은 모든 걸 인간적인 문제로 치환해서 이해하고 해결하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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