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방송뉴스를 유심히 보아온 사람이라면 적당한 덧칠이나 약간의 과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용되는 몇몇 ‘분야’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인기인에 관한 신변잡기 기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연예계 에피소드들 역시 어느 정도 윤색이 가해져도 별 불평이나 항의 없이 그럭저럭 넘어가는 기사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미담’ 기사가 이 범주 안에 포함된다. 누군가가 선행을 했다면 그 사람이 가진 사소한 흠결 정도는 눈감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듯한 제목을 뽑아 선행을 과장스럽게 부각해도 기자건 독자건 “좋은 의도니까”라며 무감각하게 넘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미담기사’가 본질적인 왜곡이거나 오보임이 판명났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무감각한 관습에 대해 반성하고 저널리즘의 윤리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지난 한 주 사람들을 분노케 했던 ‘수경사 미담’은 그 대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방송 3사가 경쟁적으로 전해주었던 수경사 승려의 미담은 그 중 한 방송사의 심층 탐사취재로 인해 거짓과 미화로 덮여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결국 3사가 일제히 오보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방송사 오보의 원인을 부실한 외주제작사와 허술한 외주제작 관리체계에서 찾는다. 이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역시 똑같은 오보를 했는가. 오히려 방송사와는 달리 두 신문사는 제대로 된 사과문 하나 발표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는 ‘기자수첩’이라는 이상한 방식을 통해 담당기자 개인의 소회를 밝혔을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두 신문사와 세 방송사가 명백한 ‘오보’를 했다는 점이고, 그 원인은 ‘미담기사’에 대한 관용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범죄기사건 미담기사건, 성실한 취재로 밝혀낸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이 왜 자꾸 무시되는 걸까.
2년 전 문화일보는 “‘위안부’ 돕다 병마에 쓰러져”라는 제목으로 한 일본인에 관한 미담기사를 실었다.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한 일본인이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병원비가 부족하다는 내용이었고, 성금을 보낼 계좌번호까지 기사에 실렸다. 문제는 그 기사가 당사자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기사화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일언반구 없이 어긴 점에 대해 가장 분노했으며, 개인정보는 물론 기사내용 상당 부분이 오류와 왜곡, 추측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특히 모금을 해야 할 만큼 치료비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도 이후 동정과 모욕이 담긴 전화들로 인해 그는 정신적 고통까지 감내해야 했다.
결국 언론중재위원회 제소, 타 신문사 및 한 방송사의 후속 보도로까지 이어졌던 이 ‘미담기사’ 사건의 전말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언론들이 ‘미화’에 대해서 얼마나 무감각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항의에 대한 신문사측 반응은 “좋은 의도로 기사화했는데 왜 그러느냐”로 요약될 수 있었을 뿐 취재 및 기사쓰기 방식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관련 내용을 본인의 동의를 받아 칼럼으로 게재하라’는 언론중재위의 결정마저 무시한 채 땜질용 수습에 분주할 뿐이었다. “한때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사람으로,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라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만약 2년 전의 이 기사와 후속 사건들로 인해 기자들이 “미담기사도 (당사자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래서 감상적인 윤색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면, ‘수경사 미담’ 오보는 반감될 수 있지 않았을까? 정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미담이다.
‘때깔’을 내기 위해 ‘손질’을 해서 아름답게 만드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손질’로 인해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윤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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