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편집국에서] 법원을 바꾸는 정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 법원을 바꾸는 정치

입력
2005.07.05 00:00
0 0

“낙태에 찬성하면 공화당 후보가 될 수 없고, 반대하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미국 정치과정에 관한 책에 자주 등장하는 경구(警句)다. 기독교우파(Religious Right)의 지지 없이 공화당내 대권레이스에서 이길 수 없고, 임신중절을 반대하면 여성ㆍ진보 표 등을 무더기로 잃어 본선에서 진다는 뜻이다.

이 말은 또 오랜 선거 캠페인을 통해 미국의 정책 이슈가 어떻게 중도로 수렴하는가를 설명해준다. 절반으로 갈린 현안에 대해서는 차라리 모호한 입장을 취해야만 훗날 통합과 조정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쓰였다.

하지만 지금 그 수많은 책의 저자들은 개정판을 냈거나, 한창 내용을 고치느라 바쁠 것이다. 낙태 금지를 공약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선거에서 내리 두 번 승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지금 미국 정치의 주도권은 바로 낙태의 불법화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쥐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보수주의(Social Conservatives) 세력이다.

이들은 공화당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2004년 대선에서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각종 통계를 통해 입증됐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기업보수주의(Business Conservatives) 세력이 다소 귀족적인 반면, 이들은 교회와 전도사를 통해 풀뿌리 민심을 움직였다.

더욱이 종교, 가족과 윤리, 생명 문제를 정치쟁점화해 상대를 곧바로 비도덕적인 인물로 몰아세운다. 때문에 대선에서 연패한 한 미 민주당은 윤리 문제만 나오면 꼬리를 내리고 있다. 역설적인 비유이지만, 지난 대선 이후 우리나라에서 젊은 표와 촛불시위의 위력에 놀란 정치인들이 ‘반민주’ ‘수구골통’이란 낙인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를 상상해 보면 된다.

기세 등등한 사회적 보수세력이 추진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재편(Realignment)’이다. 그것도 무려 30년 이상,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종착역은 바로 ‘9명의 현인(賢人)’으로 구성된 연방대법원을 바꾸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 사회의 지표가 얼마나 오른쪽으로 이동했는지는 1일 사임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에 대한 평가에서 알 수 있다. 오코너 대법관은 누가 뭐래도 18세기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민주당과 언론은 지금 그를 “중도의 여왕(Queen of Center)”이라고 칭송하며 “더도 말고 샌드라 같은 후임자가 임명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원 개조사업의 시발점은 1973년 낙태와 관련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사건 판결이다. 제인 로 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노마 맥코비가 강간에 의해 임신을 했다고 주장한 뒤 의사 제임스 홀포드로부터 중절수술을 받고 텍사스 낙태금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대법원은 7대2로 텍사스의 관련 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낙태찬성(pro-choice) 진영과 맞서던 낙태 반대(pro-life) 진영은 ‘망명을 떠난 헌법’(Constitution in Exile)을 선거를 통해 되찾아오기로 다짐했다. 2004년까지 10번의 대선 가운데 7번을 승리한 공화당은 이제 후임 대법관 임명으로 개조사업의 대미를 장식하려 하고 있다.

보스 논객 그로버 노키스트는 “백악관에서 쫓겨났고, 의회를 잃어버린 좌파의 마지막 보루는 법원”이라고 호언했다. 지난해 총선후 “30년 집권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장담한 우리 여당이 헌법재판소 개조론을 폈던 것과 묘하게 대응된다. 분열과 갈등을 가져올 게 뻔한데도, 세계에선 이념에 속박된 집요한 십자군식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유승우 swy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