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피스&그린보트'에 오르며] (3)'난띵가'를 기다리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피스&그린보트'에 오르며] (3)'난띵가'를 기다리며

입력
2005.07.05 00:00
0 0

나는 1947년 이 땅에 태어났다. 해방된 지 2년째 되는 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나는 이 글을 쓴다. 21세기의 진정한 주인들을 위해서, 일본인들에 대해서 쓴다.

92년 나는 미국 한 대학의 교환교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한밤에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었다. 일본인이었다. 나는 일본어를 잘 읽어도 듣고 말하기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서툴다. 그런데도 그 일본인은 말했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서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 일본의 나고야(名古屋)에서 교환 교수로 온 수학자인데, 나를 도와주기로 한 일본인 교환 교수가 여행을 떠나버렸다. 그는 떠나면서, 당신이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례를 용서하시고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일본인은 원래 잘 이러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에 대한 ‘폐 끼치기’를 매우 싫어한다. 물에 빠진 일본인을 건져놓으면 “살려주어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대신,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하고 말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그는 조그만 영어사전을 하나 가지고 다녔다. 미국인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말하고 싶으면 점심을 뜻하는 사전의 ‘lunch’ 항목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우리 집에서만 불리는 수학 교수의 별명은 ‘난띵까’였다.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 특정 명사가 생각나지 않으면 ‘뭐더라’ 하면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듯이, 일본인들에게도 그런 버릇이 있다. 그런데 그 수학 교수는 일본말의 ‘나니(何)’와 영어의 ‘띵(thing)’을 넣어, ‘난띵까(뭐더라)’ 하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난띵까’였다.

1년 머문 뒤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나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어디에서 할까? 내가 물었다. 그는, 스테이크라면 어디, 통돼지 요리라면 어디, 유럽식 정찬이라면 어디, 이런 식으로 10여개의 음식점 이름을 줄줄이 뀀으로써, 겨우 한두 군데만 단골로 삼고 다니던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고추장 단지 끼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와 가족이 대학 도시를 떠나던 날, 나도 공항으로 나갔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미국 여인 10여명이 그를 배웅하러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귀도 의심했다. 그는 미국 여인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미국 여인들은 그에게 서툴게나마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미국 여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영어를 익혔다고 말했다.

나는 일본에서 수많은 일본인들을 만나 보았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일본인 여행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내 나라에서 일본인들을 사귀기도 했다.

나는 일본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8월 12일부터 나는 환경과 평화를 의논하는 ‘피스 & 그린보트’ 위에서 수백 명의 일본인들을 만나게 된다. 영어를 아는 일본인과는 영어로 말하겠지만 영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들에게는 서툴게나마 일본어로 말을 걸어볼 것이다.

’난띵까’ 교수가 영어 사전 가지고 다녔듯이 나도 한일사전(韓日辭典)을 가지고 갈 것이다. 정 안 되면 나도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항목을 들이댈 것이다. “일본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는, 무섭게 적응하는 무수한 ‘난띵까’들을 만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이윤기(소설가ㆍ번역가)

‘피스 & 그린보트’는 광복 60년ㆍ종전 60년을 맞아 한일 양국 시민과 전문가 등 600여명이 8월13~27일 2만4,000톤급 크루즈 후지마루(富士丸)호를 타고 한ㆍ중ㆍ일 3개국을 순회하며 아시아의 화합을 기원하는 행사다. 이 행사는 한국일보와 환경재단, MBC, 일본 시민단체 피스보트가 공동주최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